《조선시대라고 ‘사농(士農)’, 선비와 농민만 살았으랴. 오늘날 정도는 아니라 해도 수많은 ‘공상(工商)’이 살았다. 조선의 진면목은 낮과 궁(宮)뿐 아니라 밤과 저잣거리에도 있을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신 젊은 연구자들이 사료의 짧은 기록을 추적해 그들의 세계를 조명한다. 다양한 직업을 조명하는 기고를 매주 1회 연재한다.》
“13일 마경장(磨鏡匠) 15명을 대령하라 했는데, 하지 않았다. 공조와 상의원 해당 관원을 국문하라!”(연산군일기 1504년·연산 10년 1월 14일)
마경장이 뭐하는 사람이기에 연산군은 15명이나 찾았을까?
조선 후기까지 거울은 지금 흔히 보는 유리 거울이 아닌, 청동이나 백동으로 만든 금속 거울이었다. 금속 거울은 쉽게 녹슬었다. 녹을 벗기고 갈고 닦아 맑고 선명한 빛을 다시 살리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를 담당했던 사람이 거울 가는 전문가 마경장이다. 낡고 녹슨 거울은 마경장 손끝에서 새것으로 거듭났다.
훗날 작성된, 경모궁(景慕宮·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의 사당)에서 제사 지낼 때 쓸 물건을 제작하기 위해 만든 ‘경모궁악기조성청의궤’를 보면 마경장이 거울을 닦는 데 썼던 도구가 나온다. 강려석, 중려석, 연일려석과 법유이다. 강려석은 거친 숫돌, 중려석은 중간 거칠기 숫돌, 연일려석은 포항 연일 특산의 고운 숫돌을 말한다. 법유는 들기름이다.
도구가 단출한 편이라 공정도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무조건 부지런히 간다고 잘하는 게 아니다. 숫돌 세 종류를 고루 잘 써야 한다. 또 청동, 백동 등 거울 재질에 맞춰 연마 강도도 조절해야 한다. 여기에 들기름 적당량을 발라야 광택도 얻고 녹스는 것을 막는 효과도 볼 수 있다. 작업 과정에 숙련도와 전문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전문성은 거울을 만드는 ‘경장(鏡匠)’에서 또 다른 직업인 마경장이 일찍이 갈려 나온 이유다.
연산군은 조바심 내며 마경장을 찾았다. 거울 수집가 연산군? 아니다. 마경장이 손본 거울은 연산군을 모시는 기녀들이 썼다. 기녀가 많은 만큼 치장에 쓰이는 거울도 많았고, 그만큼 마경장도 많아야 했다.
그런데 마경장이 부족했다. 마경장이 부족해 거울이 불량했고, 기녀의 꾸밈 역시 불량했다. 흥이 깨진 연산군은 다음 날 불호령을 내렸다. ‘내가 마경장 15명을 대령하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호색한 연산군은 거느린 기녀가 늘어날수록 마경장이 절실했다.
마경장이 긴요했던 또 다른 이도 있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1668∼1715)다. 윤두서 자화상은 여느 그림과 마찬가지로 붓, 물감, 종이로 그렸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재료가 하나 더 있다. 깨끗한 거울이다. 천재 화가는 거울 속에서 머리카락 한 올까지 찾았을 터. 윤두서의 거울을 갈고 닦던 마경장은 혼신의 힘을 다했을 법하다. 마경장 덕분인지, 윤두서 자화상은 잡티 하나, 수염 한 올도 놓치지 않았다.
고전소설 ‘최고운전’에서 최치원은 승상의 외동딸 나 소저를 보기 위해 남루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마경장 행세를 한다. 거울 간다는 외침을 들은 나 소저는 유모를 통해 낡은 거울을 맡긴다. 마경장은 숫돌과 참기름을 지고 ‘최고운전’의 최치원처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골목을 누비며 거울을 갈았을 것이다.
18세기에도 마경장은 조선의 골목을 누빈다. “떠오르는 달을 보면 거울 가는 법을 깨닫게 된단 말씀이야.” 19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시인 조수삼이 ‘추재기이’에 기록한 절름발이 마경장의 말이다.
마경장과 비슷한 직업으로 마광장(磨光匠)이 있다. 마광장은 옥새부터 악기까지 온갖 물건을 빛나게 하는 광택 전문가였다. 경장, 마경장, 마광장은 다른 듯 닮았다. 세 직업은 조선을 누비며 방방곡곡을 오래도록 빛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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