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도심 남천(南川)을 건너 남산(南山) 방향으로 차를 몰자 너른 들판이 펼쳐졌다. 물 댄 논 사이로 황구가 어슬렁거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탑동이다. 그런데 마을 입구를 지키는 육중한 조선시대 기와 건물이 범상치 않은 포스를 내뿜는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6부 촌장(村長)의 위패를 봉안한 양산재(楊山齋)다. 그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가니 소나무 숲 속에 감춰진 공터가 나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기록된 나정(蘿井)이다. 나정과 불과 500m 떨어진 거리에 경애왕이 살해당한 곳이자, 신라 멸망을 상징하는 포석정이 있다. 월성과 황룡사지 등 경주 중심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 천년왕국 신라의 시작과 끝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런 걸까.
2002∼2005년 윤세영 당시 중앙문화재연구원 원장(현 고려대 명예교수)과 함께 나정을 발굴한 이문형 책임조사원(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기획실장)과 이지균 조사원(현 천년문화재연구원 단장)이 살짝 성토된 땅을 손으로 가리켰다. “신라시대 ‘팔각 건물터’가 발견된 곳입니다. 신화가 역사로 바뀐 순간이죠.”
○ 작은 호기심에서 비롯된 역사적 발견
“아니, 이게 왜 이런 각도로 꺾이지?”
2002년 5월 하순 경주 나정 발굴 현장. 조선시대 건립된 비각(碑閣) 주변을 시굴하는 과정에서 건물 기단 석렬(石列)을 발견한 이문형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당연히 사각형 모양의 평면을 머리에 그리고 가장자리를 팠는데, 위로 꺾인 석렬의 각도는 수직이 아닌 둔각을 이루고 있었다. 서둘러 반대편 가장자리를 파보니 마찬가지였다. 석렬 주변에서는 신라시대 기와들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며칠 뒤 이문형은 후배 조사원들을 조용히 주말에 불러냈다. 경주시가 본래 요청한 발굴조사 내용에서 벗어나 기와 건물의 정체를 밝혀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앞서 경주시는 낙수 피해를 막기 위해 담장 이설 공사를 추진하면서 연구원에 주변 발굴을 요청한 터였다. 갑자기 발견된 기와 건물터에 대한 성격 규명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주말 이틀 동안 쉴 새 없이 노출시킨 기단 석렬은 상상을 뛰어넘는 독특한 구조였다. 경주에서 지금껏 한 번도 발굴된 적이 없는 팔각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 더구나 팔각 건물터에서 ‘義鳳四年(의봉 4년·679년)’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됨에 따라 문무왕의 삼국통일 직후 증축이 이뤄진 사실을 알 수 있게 됐다. 석렬 내부에서는 3열에 걸쳐 초석(礎石) 40개가 발견됐다. 지표가 지속적으로 깎인 탓에 초석은 불과 20cm 깊이에 묻혀 있었다. 팔각 건물터 외곽을 둘러싼 담장도 발견됐다. ○ 나정인가 신궁(神宮)인가
“고허촌(高虛村) 촌장이 양산 밑 나정 우물가에 무릎을 꿇고 우는 흰말을 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말은 사라지고 커다란 붉은 알만 있었다. 알을 깨고 나온 사내아이를 촌장이 데려와 길렀다. 아이는 이미 13세에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매 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그가 바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 탄생 신화에 등장하는 나정은 조선시대부터 진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한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역사가 아닌 허구로만 여겼다. 그러나 신라시대 팔각 건물이 발굴되면서 나정은 역사적 실재라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나정에서 추정 우물터를 중심으로 한 초기철기시대 ‘제의용 환호(環濠·마을이나 제단을 둘러싼 도랑)’가 발견돼 눈길을 끌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박혁거세의 건국 연대(기원전 57년)와 비슷한 시점에 나정이 신성시됐음을 보여주는 근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발굴단이 우물터로 지목한 유구가 사실은 기둥구멍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청동기시대 소도(蘇塗)처럼 환호 중앙에 커다란 나무장대를 꽂은 흔적이라는 것이다. 단, 통일신라시대 팔각 건물이 국가 제의시설이라는 발굴팀 의견에 대해선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고학·학술원 회원)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나정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박혁거세를 기리는 시조묘 혹은 김씨 시조를 기리는 신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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