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곤장 100대 맷값이 고작 7냥… 벼랑끝 서민의 ‘극한 알바’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4일 03시 00분


곤장 대신 맞아주는 ‘매품팔이’

김준근의 ‘형정풍속도’ 중 ‘곤장치고’.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제공
김준근의 ‘형정풍속도’ 중 ‘곤장치고’.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제공
“이때 본읍 김좌수가 흥부를 불러 하는 말이 ‘돈 삼십 냥을 줄 것이니 내 대신 감영에 가서 매를 맞고 오라.’ 흥부 생각하되, ‘삼십 냥을 받아 열 냥어치 양식 사고 닷 냥어치 반찬 사고 닷 냥어치 나무 사고 열 냥이 남거든 매 맞고 와서 몸조섭 하리라.’”(‘흥부전’에서)

반년 치 생활비를 준다면 길이 1.7m의 나무 몽둥이로 엉덩이 백 대를 맞겠는가? 이 질문에 서슴없이 그러마고 한 사람이 있었다. ‘흥부전’의 주인공 흥부다.

흥부는 곤장을 대신 맞아주면 30냥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몇 대를 맞는 조건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곤장의 최대한도가 백 대니 그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전까지 흥부가 하던 일은 말편자 박기(5푼), 분뇨 수거(2푼), 빗자루 만들기(1푼) 따위였다. 100푼이 1냥이니, 30냥을 벌려면 말편자 600개를 박거나 화장실 1500곳을 청소하거나 빗자루 3000개를 만들어야 한다.


당시 일용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20푼 정도였다. 30냥이면 150일 치 임금에 해당한다. 넉넉잡아 반년 치 생활비다. 흥부는 제안을 수락하지만 공교롭게도 김좌수에게 특별사면이 내려지는 바람에 거래는 무산되고 말았다.

돈을 받고 곤장을 대신 맞아주는 일이 실제로 있었을까? 소설의 설정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승정원일기’에 “돈을 받고 대신 곤장을 맞는다”는 기록이 더러 보이니 매품팔이의 존재는 엄연한 사실이다. 처음부터 돈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아들이 늙고 병든 아버지 대신 곤장을 맞겠다고 나섰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종종 보인다. ‘미암일기’에도 아들이 아버지 대신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비속이 존속 대신 곤장을 맞는 것은 일종의 효행으로 간주하여 암암리에 허용한 듯하다.

주인이 맞아야 할 매를 노비가 대신 맞는 경우도 흔했다. 귀하신 양반은 맞으면 안 되지만 미천한 노비는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느새 거래로 바뀌었다.

조선 후기 문인 성대중의 ‘청성잡기’에는 직업적 매품팔이가 등장한다. 그가 곤장 백 대를 맞고 받는 돈은 고작 7냥이다. 욕심쟁이 아내가 채근하는 바람에 하루 세 차례나 매품을 팔던 그는 결국 죽고 말았다. 흥부는 30냥이나 받기로 했는데, 어째서 그는 7냥밖에 못 받은 것일까. 조선의 법전에 따르면 곤장 백 대는 7냥의 벌금으로 대납이 가능하다. 매품팔이의 품삯이 7냥을 넘으면 고용할 이유가 없다. 벌금을 내면 그만이다. 흥부가 30냥을 받기로 했다는 말은 과장이다.

받은 돈을 다 갖는 것도 아니다. 곤장을 치는 형리(刑吏)와 나눠야 한다. ‘청성잡기’에는 매품팔이가 형리에게 줄 돈을 아끼다가 더욱 호되게 곤장을 맞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곤장을 치는 횟수는 정해져 있지만 강도는 치는 사람 마음이다. 형리에게 뇌물을 주고 살살 치게 했다는 기록은 셀 수 없이 많다. 뇌물을 주지 않아 불구가 된 사람도 있다. 매품팔이가 손에 쥐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돈을 받고 곤장을 맞아주는 매품팔이는 사법 질서를 문란케 하는 존재다. 하지만 그 또한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편하게 큰돈을 벌었다면 모르거니와 푼돈에 목숨을 걸었던 그들을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매품팔이#극한 알바#청성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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