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집주름이 나타나 생업을 꾸리니, 큰 집인지 게딱지인지를 속으로 따진다. 천 냥을 매매하고 백 냥을 값으로 받으니, 동쪽 집 사람에게 서쪽 집을 가리킨다.”(신택권의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 중에서)
조선시대에는 부동산중개업자를 ‘집주름(家쾌·가쾌)’이라 불렀다. 이들이 직업으로 자리를 잡은 건 18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당대 양반들이 집주름에게 갖는 이미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조선왕조실록 1753년(영조 29년) 7월 5일 기사에는 부마도위(駙馬都尉·왕의 사위)의 후손 윤성동이 집주름으로 전락한 사실이 소개됐는데, 그를 무뢰배라고 표현하고 있다. 연암 박지원 역시 ‘마장전(馬(장,제)傳)’에서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으로 말 거간꾼과 집주름을 들었으며, ‘광문자전(廣文者傳)’에서는 사람 때리기를 좋아했던 표철주가 늙고 가난해져 하는 일 따위로 언급했다.
그럼에도 18세기 후반 이들의 활동은 꽤 활발했다. 집주름은 한양의 부유층들이 몰려 있는 북촌(청계천 북쪽 일대)뿐 아니라 몰락한 양반들과 선비들이 모여 사는 남촌,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종로 주변 외진 골목과 시장 주변의 집들을 주거래 대상으로 삼은 듯하다.
심노숭의 ‘자저실기(自著實紀)’에서도 이익모가 1796년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집주름을 불러 상동(현재 북창동과 남창동이 걸쳐 있었던 지역)에 있는 홍선양의 고택을 7000냥에 구입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집주름의 수입, 즉 중개수수료는 어느 정도였을까? 신택권은 ‘성시전도시’에서 ‘천 냥을 매매하고 백 냥을 값으로 받으니’라고 언급했다. 김형규의 일기 ‘청우일록(靑又日錄)’ 1880년 2월 14일 기록에도 350냥짜리 집에 대한 거래로 받은 수수료가 40냥이었다. 18세기 후반∼19세기 후반 집주름의 중개수수료는 거래가의 10%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소 많아 보이지만 정보를 독점할 수 있었던 시대라는 점과 당시 고리대금의 연 이자가 보통 30%를 넘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는 수수료가 크게 적어졌다. 1922년 1월 2일 동아일보에는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집주름 600명 중 123명이 1921년에 새로 창설된 가옥중개인조합의 활동을 반대한다는 진정서를 종로경찰서와 경기도 경찰부 경무국에 제출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새로운 조합이 수수료를 너무 많이 받도록 규정했다는 게 이유였다.
얼마나 받았을까? 집주름은 거래가의 0.8%를 조합에 내고,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에게 각각 거래가의 1.5%씩 받아야 한다고 정했다. 1만 원짜리 집의 거래를 성사시킨 집주름은 중개수수료로 300원을 받아 그중 80원을 조합비로 제출하고 나면 220원을 챙길 수 있었다. 오늘날보다는 여전히 약간 높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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