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암 강세황이 ‘내가 남에게 서법을 많이 가르쳤으나 정 군처럼 빠르게 성취한 자는 없었다’라고 했다. 우리 형제의 과거시험지와 원고는 모두 그가 글씨를 썼다.”(심노숭의 ‘자저실기·自著實紀’ 중에서)
1차 기록물의 대부분을 직접 붓으로 작성했던 시대, 글씨는 지식인이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뛰어난 서법을 익힐 수는 없었다. 글씨를 대신 써 주는 전문가가 있었으니, 이들을 서수(書手)라 불렀다.
서수에 대한 언급은 고려시대부터 등장한다.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고려시대 문하부(門下府) 이속(吏屬)에 서수의 직임을 두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정약용의 목민심서 이전(吏典) 6조에는 고려시대 관직 중에 서인들이 주로 담당하는 분야 중 하나로 제시됐다.
18세기 후반을 전후해 서수들은 뛰어난 글씨로 민간 분야에서 전문가 집단을 형성했다. 영조실록에 이제동이라는 인물이 신씨 집안에서 10년 넘게 서수 노릇을 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서수들은 주로 어떤 자료를 필사했을까?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부藁)에 실린 ‘병오기행’은 서수들이 없어서 시를 빨리 필사할 수 없다고 했다. 18세기 한양의 세책가(貰冊家·책 대여점)에서 주로 다뤘던 한글소설 역시 전문 필사자들이 베꼈다.
무엇보다 서수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곳은 과거시험 현장이었다. 조선 후기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은 좋은 자리를 잡아주는 선접군, 답지를 대신 작성해 주는 거벽, 작성된 답지를 깔끔하게 필사해 주는 서수와 한 팀을 이뤄 시험을 치렀다. 이익이 과거시험 답지를 스스로 작성하는 사람이 10%도 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기록을 볼 때 이러한 모습은 당시 매우 일반적인 것으로 보인다. 서수의 대필은 과거시험 부정행위로 연결되고 사회문제로도 부각됐다. 정조는 거벽과 서수의 과거시험장 출입 금지령을 내렸으나 완전히 근절하지는 못했다.
관에 제출하는 공문서 작성 및 필사 역시 서수가 담당했다. 서수는 작문이 불가능한 사람들의 문서 작성을 대행하거나 훌륭한 글씨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 수수료를 받고 필사를 했다. 목민심서 호전 6조 ‘호적’에는 호적 작성을 둘러싼 비용과 비리가 기록돼 있다. 관아에서 호적 대장의 등서(謄書·원본에서 베껴 옮김)를 위해 거두어들이는 벼인 정서조(正書租)는 가구별로 한 말(약 1냥)이 제시됐는데, 여기에 문서를 필사하는 서수들의 품삯도 포함됐다. 이처럼 서수들은 사대부가의 기록물, 고전소설, 과거시험 답지, 그리고 각종 공문서 등의 필사를 담당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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