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 싼 흰 가루 한 봉지를 펼쳐 놓고 문 곁에서 말하기를 중국에서 왔다고 하는구나. 늙은 아내는 병이 많아 머리 감기조차 못하고 화장대는 거미줄이 얼기설기 쳐져 있네.”(이색의 ‘매분자·賣粉者’에서)
기생들을 왕실로 불러들여 연희를 자주 즐겼던 연산군은 보염서(補艶署)를 두어 왕실에서 필요한 의복과 화장품 공급을 전담하게 했다. 유희춘(1513∼1577)은 아내가 화장품을 팔아 번 돈으로 자신의 집무실을 지었다는 기록도 있다. ‘홍재전서’에는 예단과 고가의 사치품인 화장품을 마련하지 못해 혼인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며 사회문제로 지적했다.
화장에 대한 기록을 보면 사대부가의 여성들까지 화장에 높은 관심이 있었고, 수요량이 증가하며 활발하게 유통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정복이 지은 ‘여용국전(女容國傳)’은 여자의 얼굴(국가)에 각종 이물질(적군)이 침입하자 화장(아군)으로 이들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빙허각 이씨는 ‘규합총서’에서 조선 여성의 머리 모양, 눈썹 화장, 얼굴 화장 등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정리했다.
전통시대 화장품 판매업자를 ‘매분구(賣粉(구,우))’라고 불렀다. 매분구에 대한 기록은 다양한 에피소드 속에 등장한다. 고려 말 이색은 매분자(賣粉者)라는 시에서 중국에서 수입한 화장품 판매업자 앞에서 늙고 병들어 화장을 할 수 없게 된 아내를 생각하는 시를 지었다.
1488년 성종실록에는 매분구이면서 로비스트로 활약한 망오지(亡吾之)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화장품 방문판매를 하면서 남의 재물을 조정의 관리들에게 뇌물로 바치고 청탁을 하다 발각돼 처벌을 받았다.
조구명(1693∼1737)은 한 남성에 대한 정절을 지킨 여인의 이야기를 단편소설로 남겼다. 아름다운 여인과 이웃집 남자의 애틋한 사랑, 실패, 상사병, 죽음 그리고 정절이 어우러진 러브스토리인데 이 이야기 속 여자 주인공의 직업이 바로 매분구였다. 그녀는 주로 연분(鉛粉·흰 가루로 된 화장품)을 판매했다.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서울에는 영희전(현재 중부경찰서 앞) 동쪽 안팎에 2개씩 총 4개의 화장품 판매점인 분전(粉廛)이 운영되었다. 판매담당자는 모두 여성이었으며, 방문판매도 함께 했다. 매분구는 매장 직원과 외판원으로 구분되었거나 동일인이 두 역할을 함께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1908년에는 만전회춘당과 국영당약국이 황성신문에 화장품 광고를 실었다. 화장품 판매업은 이 시기를 전후해 광고가 필요할 만큼 상설 매장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1915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박가분이라는 화장품이 1918년 특허국에 정식 상표로 등록되면서 화장품 생산은 기업화되었다. 다만 제조업체들이 유통까지 맡기는 어려웠고, 1960년대 중반까지는 도매상들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방문판매가 화장품 유통을 주도하며 현대판 매분구의 전성시대를 맞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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