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교함이 날로 심해지고, 사기가 날로 들끓고 있다. 굶어죽은 시체를 업고 밤에 남의 집 문을 열어젖히고 주인을 급히 부른다. 성질을 돋게 하여 서로 주먹질을 하는 데까지 이른 뒤에 큰소리로 ‘주인이 내 친구를 죽였다. 관가에 고발하겠다’라고 한다. 주인은 영문도 모르고 무거운 대가를 치르고서야 일이 겨우 가라앉게 된다.” ―이옥의 ‘성진사전(成進士傳)’에서
직업이라 부르긴 어렵지만, 남을 속여 이득을 취하는 사기꾼은 전통 시대에도 있었다. 시장에서 가격을 속이고, 가짜를 진짜라고 속이고, 없는 죄를 만들거나 자신의 죄를 남에게 덮어씌우고, 투자금을 가로채는 사기 사건을 기록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광해군일기’에는 중앙정부 자산을 노린 사기 사건이 나온다. 당시 지방에서 거둬들인 세금이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유명인사를 사칭한 사기꾼이 가로채는 일이 상당히 빈번했다. 정조는 초계문신들에게 당대의 폐습을 말하며 “온 세상 사람들이 거간꾼이나 사기꾼의 구렁텅이에 빠져든 지 무려 몇 년이 되었는가?”라고 한탄하기도 한다.
사기꾼이 늘어난 원인으로는 풍속문제와 빈곤이 꼽혔다. 조선 후기 문인 이옥의 ‘성진사전’에는 두 가지 경우가 다 나온다. 친구의 시체를 이용해 돈을 뜯어낸 사건도 있고, 죽은 아이의 시체로 부잣집의 재물을 가로챈 생계형 사기꾼도 등장한다.
‘청구야담(靑邱野談)’에 실린 ‘이절도궁도우가인(李節度窮途遇佳人)’에는 시골 무인(武人)의 재산을 한양 사기꾼이 가로챈 이야기가 있다. 사기꾼은 건장한 노비를 거느리고 좋은 말을 탄 무인을 우연히 보고 벼슬을 구하러 상경한 시골 무인임을 눈치 챘다. 사기꾼은 무인에게 접근해 병조판서의 사환을 사칭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무인은 의심하기는커녕 놓칠 수 없는 기회라고 믿었다. 사기꾼은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나리 행중에 지니신 것이 얼마나 되시는지요?” 무인은 300냥이라고 알려줬다.
사기꾼은 공범 세 명을 끌어들였다. 한사람은 과부로 지내는 병조판서의 누님으로 위장했다. 병조판서가 매우 극진히 생각해 웬만한 부탁이라면 들어주는 누님이다. 두 번째는 병조판서가 신뢰하여 자문하는 동료, 세 번째는 애첩으로 위장시켰다. 사기꾼은 뇌물을 바쳐야 한다며 병조판서 누님 몫으로 100냥, 동료 50냥, 애첩 50냥을 뜯어냈다. 무인의 외모를 꾸미는 명목으로도 50냥을 뜯어냈다. 좋은 벼슬을 얻고 싶었던 무인은 감쪽같이 속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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