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는 워라밸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확산하기 위해 ‘웹뉴(웹툰·뉴스) 컬래버레이션’을 시도했다. 취재팀이 찾은 일과 삶의 붕괴 실태를 웹툰 작가들에게 보내 매회 관련 웹툰을 4컷짜리로 싣는다. 5회 ‘휴가=차력’ 웹툰은 ‘삼국전투기’ ‘MLB카툰’으로 유명한 최훈 작가가 휴가 한번 제대로 쓰기 어려운 직장인 정준익(가명) 이수영(가명·여) 부부의 사연을 토대로 그렸다. ‘남은 연차 늦지 않게 소진해 주세요.’
매달 반복되는 팀장의 ‘단톡(단체 카카오톡)방’ 공지다. 몇 번이나 숨을 골라도 오르는 혈압은 어쩔 수 없다. ‘넵!’ 하고 답을 한 뒤 금요일 연차 신청을 올린다. 기분 좋아야 할 연차 신청 때마다 울화가 치미는 건 ‘거짓 신청’이어서다. 금요일엔 당연히 근무다. 회사는 비용 줄이고, 팀장은 연차를 다 소진하면서도 성과를 올리는 유능한 팀장이 되고, 우린 휴가 때도 일이 우선인 애사심 넘치는 직장인이다.
정준익(가명·33) 씨에게 이런 ‘쉼표 없는 삶’은 6년째다. 정 씨의 아내이자 같은 회사 후배인 이수영(가명·29) 씨도 마찬가지다. 부부는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광고대행사의 광고기획자다. 업계 용어로 ‘광고주 케어(care)’가 주 업무다. “경쟁사 동향을 조사해 달라” “새로운 광고 전략을 세워 달라”는 등 광고주 요구를 수시로 받는다.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오늘 광고주 전화를 몇 통이나 받았는지 서로 비교하며 하루를 마감할 정도다.
광고주가 광고대행사 담당자의 휴가로 인한 업무 공백을 용인할 리 없다. 담당자마다 여러 광고주를 맡다 보니 업무 인수인계도 쉽지 않다. 자칫 계약이라도 끊어지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담당자가 진다. 선택은 두 가지다. 휴가 따위는 애초 머릿속에서 지우거나 언제든 일할 수 있는 환경으로 휴가를 떠나거나.
정 씨 부부는 신혼여행부터 이런 현실을 혹독히 체험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트북을 챙겼다. 인터넷이 잘 터지는 호텔을 예약했다.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신혼여행 5일 중 이틀간 노트북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광고주가 갑작스럽게 계약 내용을 변경해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관광 일정 등을 취소하면서 평생 한 번뿐이라는 허니문은 물거품이 됐다. 남들 휴가 갈 때 소주잔 건네며 가까워진 부부지만 신혼여행마저 엉망이 되자 서로 할 말이 없었다.
더 야속한 건 귀국 후, 출근 첫날 팀장의 반응이었다.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재계약은 잘 해결됐느냐”는 질문이 전부였다. 그날 퇴근 후 평소 눈물이 많지 않은 아내가 눈물을 쏟았다. 가장 소중한 순간을 망쳤다는 생각에 한 번, 회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또 한 번 가슴이 먹먹했다.
“휴가 가는 것도 요령이 있어야 하는 거야. 광고주 때문에 휴가 못 간다고 불평할 일이 아니라니까. 광고주를 잘 달래서 다녀와야지. 내가 언제 휴가 못 가게 했어?”
팀장이 술자리에서 입버릇처럼 하는 얘기다. 그때마다 팀장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한 땀 한 땀 묶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팀장 말대로라면 휴가 못 간 팀원은 그저 무능한 직원일 뿐이다. 부부가 속한 팀은 모두 8명이다. 이 중 휴가를 절반도 쓰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부부는 “휴가 못 간 게 개인 능력이라니…. 그럼 이 회사는 능력 없는 사람만 뽑는다는 얘기냐”며 넋두리를 나눈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부부는 지난해 휴가 20일 중 7일밖에 쓰지 못했다. 그것도 3, 4일씩 쪼개 써야 했다. 남들처럼 동남아라도 다녀오려면 금요일에 휴가를 내고 월요일 새벽 도착하는 일정으로 짜야 했다. 월요일 아침 여행가방을 끌고 바로 출근하는 모습은 회사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부부의 꿈은 유럽 여행이다. 하지만 올해도 유럽 여행은 감히 꿈도 못 꾼다. 다만 이번만큼은 ‘한 주’를 온전히 쉬어 보는 게 소원이다. 신혼여행 때도 이루지 못한 ‘온전한 휴가’를 올해는 꼭 가져보고 싶을 뿐이다.
팀장은 또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휴가 계획서 늦지 않게 올려 주세요. 일이 몰리는 월초나 월말은 피해 주시고….’ 올해 부부의 꿈은 이뤄질까.
▼ “연차 소진” 약속했던 대통령도 57%만 써 ▼
직장 간부들도 휴가를 못 쓰긴 마찬가지다. 경제 부처의 A 과장은 지난해 휴가를 5일밖에 쓰지 못했다. 조기 대선으로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각종 정책을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반면 A 과장과 함께 일하는 후배 직원들은 평균 10일씩 휴가를 갔다. ‘쉼표 있는 삶’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가 연차 사용을 독려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다.
문 대통령부터 “연차를 모두 소진하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했다. 자신이 쉬지 않으면 수석비서관이, 수석비서관이 쉬지 않으면 비서관과 행정관들이 줄줄이 쉬지 못하는 구조를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지난해 휴가 14일 중 8일(57%)만 썼다. 청와대가 목표치로 제시한 70%에 미치지 못했다.
한국 조직문화 특성상 직급이 올라가면 업무 범위와 책임이 넓어진다. 조직 내 대체인력을 찾기 어렵다. 특히 A 과장 같은 중간 간부들은 ‘샌드위치’ 신세다. 고위 간부가 휴가를 가면 일을 떠맡아야 하고, 아래 직원들의 휴가는 보장해줘야 한다.
김영주 일생활균형재단 WLB연구소장은 “조직의 업무를 면밀히 파악해 휴가자의 업무를 자연스럽게 인수인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 노동잡학사전 : 휴가시기는 근로자 마음 업무 ‘막대한 차질’ 생길때만 상사가 변경 가능
‘사용자는 휴가를 근로자가 청구한 시기에 주어야 한다. 다만 사업 운영에 막대한 지장이 있는 경우에는 그 시기를 변경할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상관이 허락해야 휴가를 갈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근로기준법 60조 5항에 따르면 휴가는 근로자가 정한 시기에 갈 수 있다. 사용자나 상관이 휴가를 가지 못하게 할 권리는 없다. 법으로만 따지면 근로자가 상관에게 휴가 결재를 올리고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는 셈이다.
다만 업무에 ‘막대한’ 차질이 생기는 경우에 한해 상관이 휴가를 연기시킬 수 있다. 파업 등 쟁의를 위해 근로자들이 집단적으로 연가를 내는 경우에도 회사는 휴가를 연기시킬 수 있다. 만약 근로자들이 이를 거부해 실제로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면 징계 사유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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