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후된 도심’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풍경이 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 다닥다닥 붙은 주택, 갈라진 틈새로 풀이 난 시멘트 바닥…. 어딘지 허전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전선이 늘어진 전봇대다. 전단지와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회색 기둥 위 얽히고설킨 검은 선들은 오래돼 낡은 도시 이미지를 완성시킨다.
“여기는 이런 풍경까지 매력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심각한 수준이죠.”
지난달 19일 오후 2시 종로구 익선동 한옥거리에는 평일인데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서울시 보도환경개선과 관계자가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키자 골목을 지나던 사람들이 덩달아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많이 젖힐 필요도 없었다.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 중간쯤에서 내려온 전선이 대여섯 줄씩 맞은편 건물 창문들로 들어갔다. 한 건물이라도 각 가구가 가입한 케이블TV 회사나 통신사가 다른 까닭이다.
이 관계자는 “한 건물에 밖에서 들어가는 선은 하나라는 ‘1건물 1인입(引入)’이 원칙이다. 이렇게 여러 선이 각각 들어가는 것은 사실상 불법이다”라고 말했다. 옥상에서 선을 나누는 탭오프(tapoff) 등을 써서 건물의 각 가정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게 원칙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를 규제하는 법규는 없다.
기와지붕으로 된 만홧가게 앞 전신주에 걸린 굵직한 검은 전선에 몇 줄인지 세기조차 어려운 가느다란 선이 복잡하게 걸려 있다. 가로등 밑에는 통신선으로 추정되는 선들이 동그랗게 엉켜 있다. 모든 선이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에 팽팽하게 걸려 있거나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은 아니다. 어림잡아도 열 줄이 넘는 회색, 검은색 선이 뚝뚝 끊겨 길게 늘어져서는 가게 간판에까지 아무렇게나 내려와 있다. 더 이상 쓰지 않는 폐선(廢線)이다. 이 관계자는 “이사를 간다든가 가입을 해지하면 폐선이 생기는데 (통신사 등에서) 그것을 제대로 철거하지 않고 그냥 싹둑 자르고 가버려 저렇게 흉물이 됐다”고 말했다. ‘폐선 미철거’ 역시 법적 규제가 없다.
이 같은 ‘공중 거미줄’은 1990년대 중후반 종합유선방송이 본격 시작되고 인터넷 사용이 급증하면서 걷잡을 수 없어졌다. 1999년 정보통신선을 한전 전봇대에 걸 수 있도록 허가가 나면서 기존 전선에 각종 통신선과 케이블TV선 및 장비가 함께 매달리게 됐다.
“보기에만 거슬린다면 모르겠는데 사고가 날 수 있으니 문제예요.”
전선들이 너무 무거워 과부하가 걸린 전봇대가 태풍을 비롯한 강풍에 쓰러지거나, 늘어진 전선이 밑을 지나가던 트럭에 엉켜 전봇대가 넘어가기도 한다. 이날 오후에도 부산에서 고철을 잔뜩 실은 트럭이 전선을 건드려 전봇대 2개가 쓰러졌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인근 92가구가 정전됐고 교통이 마비됐다. 불이 났을 때 소방차 진입에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공중선 정비법은 크게 두 가지다.
전봇대를 철거하고 전선과 통신선 등을 지하에 묻는 지중화(地中化)가 그 하나다. 하지만 쉽지 않다. 전선과 통신선은 지하에 매설하지만 고압전기를 220V로 변환하는 변압기나 전류 차단 개폐기는 지상에 설치해야 한다. ‘서울로 7017’의 중구 구간 아래에 있는 사람 가슴팍 정도 오는 두꺼운 철제 상자 6개에는 변압기와 개폐기가 들어 있다. 그러나 설치할 공간 자체 확보가 어렵고 그 땅의 소유주가 흔쾌히 사용을 동의하는 경우도 많지 않다. 비용도 대당 1억 원이나 된다. 이 관계자는 “시 및 자치구와 한전이 설치비용을 일대일로 부담한다. 지중화 사업은 선 1km당 약 30억 원이 드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지중화보다 더 기본에 충실한 방법은 공중선 정리다. 폐선을 걷어내고 여러 선을 하나로 묶어 건물에 들어가는 선은 한 줄이 되도록 정비하는 것이다. 공중선을 정리하려면 먼저 지방자치단체가 현장조사를 한 뒤 우선정비구역을 선정해 과학기술부에 정리 승인 신청을 해야 한다. 이날 서울시 점검도 공중선 정리를 위한 현장조사였다. 승인을 받으면 지자체와 한전, 통신사가 함께 정비에 나선다. 비용은 통신사 부담이다. 2012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공중선 정비종합계획’에서 정비 대상으로 지목한 서울시 전봇대는 약 16만 개. 서울시는 지난해까지 통신사와 함께 3만 개를 정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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