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job史]10차 방정식과 제곱근쯤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0일 03시 00분


산가지에 쓰인 나무막대들.
산가지에 쓰인 나무막대들.
둥근 땅의 둘레가 365와 4분의 1척이다. 크고 작은 개미 두 마리가 나란히 출발해서 이 땅의 둘레를 돈다. 작은 개미는 하루에 1자, 큰 개미는 하루에 13과 19분의 7자를 이동하면 두 마리 개미는 며칠 만에 만나겠는가?

―홍정하(洪正夏) ‘구일집(九一集)’

조선은 건국 초부터 조세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토지를 새롭게 측량했다. 여기에 각종 면적 계산법 및 단위 환산에 뛰어난 산학(算學·수학) 전문가가 동원됐다. 산학을 토대로 조세를 포함해 국가 회계와 측량 업무를 담당했던 전문가를 ‘산원(算員)’이라 불렀다.

산원은 복잡한 계산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동원되었다. 해와 달의 운행과 절기 변화를 계산해 달력을 정비하는 사업, 악기의 크기를 조정해 음률을 고르는 사업, 성벽을 보수하고 증축하는 사업에도 산원은 전문성을 발휘했다.

산원은 산학취재를 통해 선발했다. 산원을 선발하는 시험 문제는 ‘오조산경’ ‘상명산법’ ‘양휘산법’ ‘산학계몽’ 등 산서(算書·수학서적)에서 출제했다. 이 서적들은 실무에 필요한 측량법, 도량 환산법을 비롯해 기하학과 제곱근, 10차 방정식 등 고급 수학이 망라되어 있다. 회계를 담당했지만, 산원은 수학자이기도 했다.

조선 산원은 산학 실력을 놓고 중국 관리와 자존심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영조 때 산원 홍정하가 쓴 산학 연구서 ‘구일집’에 수학문제와 함께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홍정하는 조선에 온 중국 사력(司曆·천문관측 관리) 하국주(何國住)를 만나 산학 문제를 주고받았다. 이때 하국주는 홍정하를 얕보고 “360명이 1인당 은 1냥 8전을 냈다면 합계가 얼마인가?”라는 유치한 문제를 냈다. 홍정하는 즉시 대답했다. 하국주가 더 어려운 문제를 냈지만 홍정하는 모두 정답을 맞혔다.

동석했던 중국 관리 아제도(阿齊圖)가 조선 산원을 얕잡고 하국주를 치켜세우자 홍정하는 “구형의 옥이 있다. 내접하는 정육면체 옥을 빼놓은 껍질의 무게가 265근 50냥 5전이다. 껍질의 두께가 4치 5푼이라고 하면, 구형의 옥의 지름과 정육면체 옥의 한 변 길이는 각각 얼마인가?”라는 문제를 냈다. 하국주는 당장은 어렵고 내일 찾아오라고 했으나 결국 풀지 못했다.

산원은 산가지와 주산(籌算)을 이용해 복잡한 계산을 했다. 산가지는 가늘고 길게 다듬은 나뭇가지를 가로세로로 배열해 숫자를 표기하는 방식이었다. 주산은 곱셈표를 막대에 써서 배열하는 방식이었다. 네덜란드 선원 하멜은 조선 관원은 긴 막대기를 써 계산을 한다고 ‘하멜표류기’에 썼다.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산원은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산원은 벼슬아치가 쓰는 사모(紗帽)를 썼다. 그러나 성종 대를 지나며 문무반 대열에 함께 서지 못했다. 기능직이라는 무시 속에서도 산원은 전통 산학을 연구해 발전시켰으며 조세 업무를 담당해 나라 살림을 보필했다. 산원은 수학자이자 공인회계사였다.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구일집#산학#산원#조선 수학자#오조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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