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일본의 봄은 봄이 아니었다.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고 후유증, 20년째 이어지는 장기 불황, 활력을 잃어가는 고령사회 등 우울한 소식만 이어지고 있었다. 그해 5월. 도쿄 도심 북동쪽에 세워진 ‘스카이트리’는 유일한 희소식이었다. 634m 높이의 이 전파 송신용 철탑은 철탑 가운데는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 애초 재정 낭비라는 비판도 많았지만 밝은 뉴스 기근에 허덕이던 일본 국민은 이 철탑에 국운을 바꿔 보자는 소망을 담았다. 전 언론이 개장 소식을 대서특필했고 방문객이 미어 터졌다. 스카이트리는 이제 활력을 회복한 일본 국민의 ‘희망 탑’이 됐다.
지난해 4월 3일 개장한 국내 최고층 빌딩(555m) 잠실 롯데월드타워 신드롬도 비슷했다. 개장 후 지난달 말까지 국내외에서 165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갔고, 지난해 12월 31일 자정에는 10만여 명이 몰려든 가운데 세계 최고층 빌딩 중 가장 먼저 새해맞이 카운트다운 불꽃쇼를 펼쳤다. 2021년까지 해마다 해외 관광객 500만 명을 포함해 5000만 명이 방문하고, 국가 전체적으로 매년 10조 원의 경제효과를 낳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취업유발인원만 2만1000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롯데가 월드타워를 세운 대가는 참혹했다. 이명박 정권에서 전격적으로 허가를 받은 이후 박근혜 정권에서 전방위 보복을 당했다. 나중에 감사원 감사 결과로 밝혀졌지만 관세청은 부당한 점수 조작으로 잠실월드타워점 면세점 특허를 박탈했다. 롯데를 겨냥한 중국의 사드 보복은 박 정권이 롯데 소유 경북 성주골프장을 사드 부지로 최종 낙점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롯데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올해 2월에는 신동빈 회장이 면세점 특허를 재취득하기 위해 박 전 대통령에게 ‘묵시적’ 청탁을 했다는, 법리적으로 논란이 큰 사유로 구속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롯데월드타워 건립 인·허가를 둘러싼 검찰 재수사 가능성도 거론된다.
애초에 경제성으로만 보면 롯데는 월드타워를 세워선 안 됐다. 사업비 4조2000억 원을 회수하려면 감가상각을 빼고도 20년 이상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해외에서 국가 상징은 되지만 높은 사업비에 비해 수익성이 떨어지는 초고층 건물을 대부분 국영기업이나 국가 차원에서 진행하는 이유다. 그런데도 롯데는 1987년 사업지를 선정한 후 30년간, 신격호 신동빈 부자 2대에 걸쳐 포기하지 않았다.
사업 보류와 반려, 중단이 반복됐고, 주변에서 이제 집념을 거둘 때도 되지 않았냐고 만류했지만 신격호 총괄회장은 “한국을 상징하는 건물을 세우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서울에 오면 고궁만 보여줄 수 없다. 세계적인 명소 하나쯤 있어야 뉴욕이나 파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일본에서 온갖 견제를 뚫고 성공한 그가 자기 방식대로 조국에 바치는 마지막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지금 사태를 미리 알았더라면, 그래도 월드타워 건설을 밀어붙였을까. 신동빈 회장은 또 아무리 아버지의 뜻이라도 이를 우직하게 받들었을까.
요즘 롯데그룹은 초긴장 분위기다. 3월 결산법인인 일본롯데홀딩스 주주총회가 6월 말로 다가왔다. 예측불허의 사태가 빚어지면 신동빈 회장이 추진해왔던 한국 롯데 ‘독립 경영’의 향방도 오리무중에 빠질 수 있다. 법원은 주총에 앞서 신 회장의 보석 등 한국 롯데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막을 방안을 적극 검토해 봤으면 한다. 국내외에서 동네북 신세로 전락한 롯데 잔혹사는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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