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미등록아동 추방 취소’ 첫 판결
“부모 잘못으로 불법체류자 돼… 인권적 관점서 전향적 접근 필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인처럼 자랐지만 미등록(불법 체류) 상태로 살고 있는 한 청년에 대한 추방 취소 판결이 나왔다. 미등록 청소년의 인권을 고려해 추방을 취소한 첫 판결이 나오면서 앞으로 추방 불안 속에 살아가는 ‘그림자 아이들’(본보 2017년 5월 17일자 A1·8면) 구제에 더욱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청주지방법원 행정부(부장판사 신우정)는 17일 미등록 청년인 페버 씨(19)가 법무부 산하 청주출입국관리사무소장(현 청주출입국·외국인사무소장)을 상대로 낸 강제퇴거 명령 및 보호 명령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원고와 같이 대한민국에서 적법하게 출생했다가 부모가 체류 자격을 상실함으로써 체류 자격을 잃게 된 사람에 대해 인권적·인도적·경제적 관점에서 전향적 접근이 필요하다”며 이같이 결정했다. 또 “원고처럼 대한민국에서 출생해 사실상 오직 대한민국만을 지역적·사회적 터전으로 삼아 살아온 사람을 무작정 다른 나라로 내쫓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고 생존권을 보장해야 할 문명국가의 헌법정신에 어긋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강제퇴거 명령의 주된 취지가 ‘반사회성을 지닌 외국인으로부터 우리나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공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인데, 원고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볼 여지가 크다”고 판단했다. 페버 씨는 자신이 아닌 부모의 잘못으로 불법 체류자가 된 것이고, 불법 체류 중 취업한 사실이 있으나 동기나 기간 등을 고려할 때 반사회성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는 설명이다.
이번 판결은 ‘불법’이란 꼬리표 탓에 언제든지 가족과 떨어져 추방될 공포 속에 사는 미등록 아동을 구제한 첫 판결이다. 이탁건 재단법인 동천 변호사는 “한국 청년으로 성장한 미등록 아이들을 위해 사회적 대책을 마련할 필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페버 씨는 1999년 한국에서 나이지리아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아버지가 체류 기간을 연장받지 못해 강제 출국당하자 남은 가족이 모두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됐다. 모국으로 돌아가면 배 속 막내까지 다섯 남매를 먹여 살릴 길이 막막했던 어머니는 출입국관리사무소로부터 일시 체류 허가를 받아 아이들을 키웠다. 페버 씨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성실히 공부해 초중고교를 마쳤고, 지난해 4월 동생들을 먹여 살리려 취업했다가 당국에 붙잡혔다. 그가 추방 명령을 받고 구금돼 천식 고통과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는 사연이 본보 보도로 알려지자 시민들은 “구금을 풀어달라”는 탄원서를 보냈고, 마침내 석방됐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그는 법무부에 “추방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지만, “불법은 불법이다”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시민단체들도 그에 대한 특별 체류 허가를 요청했으나 명확한 답변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근본적인 추방 위협에서 벗어나려 소송을 진행했다. 페버 씨는 추방은 면했지만 여전히 미등록자라 취업할 수가 없다. 국내 ‘그림자 아이들’은 2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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