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관람은 그저 꿈” 문화빈곤에 우는 흙수저 청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21일 03시 00분


[컬처 까talk]연기자 지망 어느 20대의 한숨

연기자 지망생인 김상미(가명) 씨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을 바라보고 있다. 김 씨는 이 극장에서 열린 공연을 보고자 했지만 티켓 가격이 부담돼 발길을 돌린 적이 있다고 했다. 김 씨는 “웬만한 공연 티켓은 아르바이트 일당을 생각하면 살 엄두가 잘 안 난다”며 “지난해 원하는 대학에 낙방한 나는 대학생 할인도 못 받는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연기자 지망생인 김상미(가명) 씨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을 바라보고 있다. 김 씨는 이 극장에서 열린 공연을 보고자 했지만 티켓 가격이 부담돼 발길을 돌린 적이 있다고 했다. 김 씨는 “웬만한 공연 티켓은 아르바이트 일당을 생각하면 살 엄두가 잘 안 난다”며 “지난해 원하는 대학에 낙방한 나는 대학생 할인도 못 받는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대략 8만 원 정도?”

연기자 지망생인 김상미(가명·20) 씨. 그가 어렵사리 짜낼 수 있는 ‘1개월 문화생활비’는 딱 그 정도뿐이다. 서울에서 자취를 하는 김 씨는 ‘알바’(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한다. 8만 원은 그에겐 꽤 거금이지만 책 몇 권 구입하고 영화 두세 편 보고 나면 먼지처럼 사라진다. 김 씨는 “꼭 보고픈 공연은 먹고 입는 걸 줄이며 돈을 모아야 한다”면서 “지난해 뮤지컬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지만 올해는 알바도 바쁘고 예산도 빠듯해 한 번도 보질 못했다”며 한숨지었다.

장기적 취업난에 허덕이는 20, 30대 청년들이 ‘컬처 푸어(문화 빈곤) 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최근엔 영화 관람료 등도 잇따라 오르며 ‘문화 흙수저’ 분위기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김 씨는 컬처 푸어 세대의 그림자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연기자를 꿈꾸지만 작품을 볼 돈이 없다. 지난달 그는 하루 종일 커피전문점 알바에, 떡가게 파트타임까지 뛰어 150만 원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이는 ‘운수 좋은 달’일 경우다. 떡가게는 이미 ‘그만 나와도 된다’는 통보를 받은 상태. 평균 월수입은 70만∼80만 원이 고작이다. 8만 원도 기본적인 생활비를 줄여 겨우 마련한 돈이다.

“그래도 부모님이 월세를 내주셔서 형편이 나은 거예요. 함께 알바 뛰는 친구는 미술학원 보조교사와 만화작가 어시스턴트까지 세 개씩 일을 해요. 미술가를 꿈꾸는데 돈도 시간도 없어 한 달에 한 번 미술전시 보러 가기 벅차다고 하소연했어요.”

김 씨나 친구의 상황이 특별한 게 아니다. 2016년 서울시의 미취업 청년 조사에서도 한 달 생활비(약 58만 원) 가운데 여가·문화생활비는 9만8600원(17%) 안팎. 여가비를 합친 금액이 이 정도니, 문화생활비는 더 적을 수밖에 없다.

물론 공연장이나 국공립박물관은 그 나름대로 할인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웬만한 티켓 한 장에 10만 원을 훌쩍 넘는 뮤지컬이나 오페라는 할인해도 여전히 고가다. 게다가 대부분 ‘대학생’ 할인이다. 고졸인 김상미 씨 같은 청년들은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그나마 대중적이던 영화도 갈수록 부담스럽다. 최근 멀티플렉스는 관람료를 1만 원 이상으로 인상했다. 3차원(3D) 대형 화면으로 보려면 2만 원 가까이 한다. 최근 취업한 유동권 씨(29)는 “비싼 공연은 생각도 못 하고 그나마 만만한 게 영화였는데, 한 번에 10% 이상 관람료를 올리면 어떡하느냐”고 항변했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은 아쉽기 그지없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문화비전 2030’엔 생애주기·계층별 문화 여가활동 지원 대상으로 유·아동 부모와 직장인, 중장년, 장애인만 거론돼 있다.

고강섭 한국청년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36)은 “정부의 청년 정책은 일자리와 빈곤 청년의 자립 등 경제에만 초점이 맞춰졌을 뿐, 문화생활을 비롯한 청년 삶의 질에 관한 논의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청년의 문화 향유 지원을 차세대 한류(韓流)를 이끌고 뒷받침할 청년층에 대한 ‘문화적 투자’ 차원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청년실업으로 골머리를 앓긴 마찬가지인 서구사회는 어떨까.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나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 등은 할인이나 추첨 등 다양한 방식으로 청년층에 저렴한 공연 티켓을 제공하는 제도가 정착돼 있다.

문화소외계층을 뮤지컬 공연 때마다 초청한다는 제작자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는 “브로드웨이에서는 아무리 인기 있는 고가의 공연이라도 좋은 위치의 객석을 추첨을 통해 저가에 제공하는 ‘로터리’ 제도를 운영한다”며 “40만 원가량 하는 티켓을 2만5000원에 볼 수도 있어 청년층이 많이 이용한다”고 말했다. 상당수 영국 뮤지컬도 한 달에 1, 2회씩 낮 공연의 R, S석을 80∼90% 저렴한 가격으로 젊은층에 제공한다.
 
조종엽 jjj@donga.com·조윤경 기자
#문화생활비#컬처 푸어 세대#할인제도#청년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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