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51>목숨 걸고 산을 누빈 채삼군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29일 03시 00분


심마니 망태기. 인삼박물관 제공
심마니 망태기. 인삼박물관 제공
“산삼을 캐는 사람은 허가증을 받고 산에 들어가 풍찬노숙하며 가을과 겨울을 보낸다. 범, 이리, 곰, 멧돼지를 만나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온갖 고생을 겪는다. 산에서 나오면 관원이 주머니와 품속을 뒤진다. 산삼이 한 조각이라도 나오면 용서하지 않는다. 모조리 헐값으로 빼앗아 관청에 들이고, 진상한다는 핑계로 전부 제 주머니를 채운다.”―목민심서

심마니는 반드시 무리 지어 다닌다. 산속에서 며칠, 몇 달 동안 먹고 자며 산삼을 찾는 일은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첩첩산중에서 산짐승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이다.

허가 없이 산삼을 캐는 행위는 불법이다. 밀수꾼으로 간주하여 체포된다. 산삼은 전부 몰수되고, 사형까지 당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온갖 징크스가 생겼다. 산삼을 캐러 갈 때는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입산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음식을 가리며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다. 산에 도착하면 제사부터 지낸다.


심마니 무리는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노련한 심마니가 ‘어인(御人)’이라는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소댕이’로 불리는 초보자는 잡일을 도맡았다.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말을 써서 보통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산삼을 캐는 시기는 처서(8월 말)부터 한로(10월 초)까지다. 산삼을 발견하면 ‘심봤다’라고 외친다. 산삼은 무리 지어 자라므로 주위에 또 다른 산삼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심봤다’라고 외친 사람이 우선권을 갖는 것이다. 그가 수색을 마쳐야 나머지 심마니들의 차례가 온다.

원래 우리나라 산삼은 경북 경주 일대에서 나는 ‘나삼(羅蔘)’을 으뜸으로 친다. 그러나 나삼은 조선후기에 오면 씨가 말라버린다. 그 다음이 평안도 강계의 ‘강삼(江蔘)’, 함경도의 ‘북삼(北蔘)’이다. 중국산 ‘호삼(胡蔘)’은 최하품이다.

산삼이 많은 곳은 평안도와 함경도의 국경지대이다. 국경을 넘으면 더 많지만, 발각되면 사형이다. 잠입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중국 심마니다. 총과 활로 무장하고 수십 명씩 무리 지어 다녔다. 조선군과 전투를 벌이거나 민가를 약탈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조선 사람도 국경을 넘어 산삼을 캐다가 죽거나 다치곤 했다. 외교 문제까지 되기도 했다. 산삼은 이 모든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었다.

중국 심마니 말고도 조심해야 할 것이 또 있다. 동료 심마니다. 영평(현재의 경기도 포천)의 심마니 김 씨는 동료 두 사람과 산삼을 캐러 백운산에 들어갔다가 절벽에 버려졌다. 동료들은 김 씨가 캐어서 올려 보낸 산삼만 챙겨 달아났다. 김 씨는 남은 산삼을 먹으며 예닐곱 날을 버티다 느닷없이 나타난 구렁이에게 매달려 절벽을 올라왔다. 산을 내려가던 김 씨는 시신 2구를 발견했다. 독초를 먹고 죽은 동료 심마니였다. ‘청구야담(靑邱野談)’에 나오는 이야기다. 국가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고, 동료조차 믿을 수 없는 심마니는 목숨을 건 직업이었다.

고생해서 산삼을 캐도 심마니에게 돌아가는 몫은 별로 없다. 인삼 상인은 헐값에 산삼을 사들여 사신단을 따라 중국에 가서 팔거나 동래 왜관의 일본인들에게 팔아 엄청난 이익을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과 이득을 보는 사람은 따로 있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심마니#채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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