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를 한 손에 든 채 흡연실 밖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민 40대 남성이 일행에게 소리쳤다. 28일 오후 7시 반 서울 종로구 S당구장은 인근에서 일하는 회사원으로 가득했다. 당구장 안 공기는 담배 연기로 매캐했다. 5m²(약 1.5평) 남짓한 흡연실에 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업주 A 씨는 “손님들이 드나들기 불편하다고 해 문을 떼어냈다”고 말했다.
당구장 등 실내 체육시설은 국민건강증진법에 따라 3월 5일부터 금연구역이 됐지만 업주가 원하면 내부에 흡연실을 설치할 수 있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 국가금연지원센터가 집계해보니 전국 금연구역(PC방, 스크린골프장, 음식점 등) 내 흡연실은 4만2883곳이나 됐다. 흡연자 단체는 “거리에 설치된 흡연실이 40곳(서울 기준)에 불과하다”며 확대를 주장하지만 실제론 금연구역 안에도 이 같은 ‘히든 스모킹 존(숨은 흡연구역)’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문제는 경쟁 업소에 흡연자 손님을 빼앗기기도, 환기설비에 큰돈을 들이기도 싫은 업주들이 ‘기준 미달’의 흡연실을 설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행법상 금연구역 내 흡연실은 △비흡연자가 다니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밀폐되고 △환풍기 등 환기설비를 완비하고 △탁자 등 영업용품 없이 재떨이만 둬야 한다. 하지만 동아일보 취재팀이 25∼29일 금연구역 내 흡연실 30곳을 취재한 결과 11곳이 이 같은 기준을 위반한 상태였다.
#유형1. 활짝 열린 흡연실
종로구 S당구장처럼 흡연실 문을 아예 떼어낸 사례는 드물지만 문이 있으나 마나 한 흡연실은 심심찮게 찾을 수 있었다. 25일 오후 7시경 종로구 A주점은 흡연실의 미닫이문이 닫히지 않게 맥주 통으로 막아두고 있었다. 업주는 “손님들이 본격적으로 오기 전 청소하려고 열어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오후 10시경 다시 찾았을 때도 이 문은 열려 있었다. 서울 강남구 J주점 흡연실은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고 5cm가량 열려 있는 구조여서 문틈으로 계속 담배 연기가 새어나왔다.
#유형2. 휴게실형 흡연실
흡연실에 각종 오락 및 편의 설비를 두는 것도 기준 위반이다. 흡연실을 사실상 영업장으로 활용하거나 흡연자를 오래 붙잡아두는 걸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종로구 J스크린골프장은 흡연실 내에 탁자와 소파뿐 아니라 정수기, 커피머신, 바둑판까지 두고 있었다. 강남구 M영화관은 멀티플렉스로선 드물게 흡연실을 두고 있다. 문을 이중으로 설치하고 환풍기를 여러 대 둔 덕에 담배 연기가 덜 새어나가는 편이었지만 벽에 걸어둔 TV에서 끊임없이 영화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유형3. 복도 흡연실
공동으로 이용하는 화장실이나 복도, 계단은 흡연실로 쓸 수 없다. 비흡연자가 수시로 지나다닐 수 있어서다. 강남구의 한 건물 2층에 자리 잡은 A주점은 흡연실을 설치하는 대신에 보란 듯이 입구 앞 복도에 재떨이를 두고 사실상 흡연실로 운영했다. 술집을 찾는 손님이라면 누구나 담배 연기를 들이마셔야 하는 것이다. V커피숍은 흡연실이 어딘지 묻는 손님들을 비상계단으로 안내했다. 계단 한쪽엔 재떨이와 함께 쓰레기봉투 등 인화물질이 쌓여 있었다. 화재 시 대피로로 사용해야 할 비상계단이 화재를 일으킬 위험으로 가득한 셈이다.
현행법상 흡연실 시설기준을 어기면 처음엔 업주에게 시정명령을 내리고 다시 적발되면 과태료를 170만 원부터 500만 원까지 단계적으로 올려 물리도록 돼 있다. 하지만 시설기준 위반으로 과태료를 문 흡연실은 국민건강증진법이 시행된 1995년 9월 이후로 단 1곳도 없다. 보건소와 지방자치단체가 주의 조치를 749건 내린 게 전부다. 서울의 한 자치구의 단속원은 “과태료를 물린 전례가 없고 액수도 큰 편이어서 과태료 부과가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실내 흡연실 설치를 전면 금지하는 내용의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을 추진할 방침이다. 폐쇄된 형태의 실내 흡연실은 아무리 철저히 관리해도 간접흡연 피해를 완전히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규 국가금연지원센터장(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겸임교수)은 “지붕과 벽면이 절반 이상 개방된 야외에만 흡연구역을 설치하되 국가 금연 지원 서비스 안내문과 금연 홍보 문구를 반드시 내걸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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