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석주 “선제골 영웅→백태클 역적… 이번엔 영웅만 나오길”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5일 03시 00분


[그 순간 다시 온다면]<1>1998년 ‘1차전 퇴장’ 하석주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의 첫 월드컵 선제골과 백태클 퇴장이라는 영광과 치욕을 동시에 겪었던 하석주 아주대 감독이 멋쩍게
 웃으며 20년 전 백태클을 재연하고 있다. 하 감독은 “이번 월드컵에선 역적이 아닌 영웅이 탄생하길 바란다”는 소망을 전했다. 
수원=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의 첫 월드컵 선제골과 백태클 퇴장이라는 영광과 치욕을 동시에 겪었던 하석주 아주대 감독이 멋쩍게 웃으며 20년 전 백태클을 재연하고 있다. 하 감독은 “이번 월드컵에선 역적이 아닌 영웅이 탄생하길 바란다”는 소망을 전했다. 수원=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세계가 주목하는 ‘꿈의 무대’ 월드컵에서는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선명하게 이루어진다. 잊혀지지 않을 월드컵 경험을 오늘의 교훈으로 이어가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첫 회는 하석주 아주대 감독의 이야기다. 그는 백태클 규정이 강화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전에서 이로 인한 첫 퇴장 선수로 기록됐다.》

시간이 약이라더니 그 명약(名藥)도 하석주 아주대 감독(50)에겐 소용이 없는 듯했다. 멕시코전 ‘백태클’의 기억을 더듬는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당시를 설명하는 그의 말 속엔 20년 묵은 한(恨)이 배어 있었다. “이번에 후배들이 멕시코를 잡는다 해도 이건 제가 평생 안고 가야 할 트라우마(상처)라….”

지난달 22일 수원시 아주대. 하 감독과 아주대 선수단 숙소에서 인터뷰를 끝내고 운동장으로 기사에 쓸 사진을 찍으러 갈 때였다. “이런 분에게 ‘백태클 포즈’를 부탁해도 될까….” 머릿속에 고민이 가득한 채로 촬영지에 도착했다. 그때 하 감독이 분위기를 바꿔 밝은 톤으로 먼저 운을 뗐다. “이렇게요? 좀 더 다리를 뻗어야 하나? 하하하.”

그 유쾌한 반전은 어쩌면, 지난 세월 동안 하 감독이 터득한 대처 방법이었지 모른다.

이젠 한국 축구 팬 사이에 전설(?)로 언급되는 과거가 됐지만, 하 감독에게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한국과 멕시코의 조별예선 1차전의 백태클은 잊히지 않는 현재의 기억이다. 아니 지우고 싶지만 늘 악착같이 따라붙는 악령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날처럼 어느덧 너스레를 떨며 되받아치는 요령도 생겼지만, 그때를 말할 때마다 가슴이 뜨끔뜨끔하는 건 여전하다.

“그래도 당시 하석주 하면 시원하게 축구 하는 선수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그 한순간으로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건 아닌가 너무 속상했어요. 이후 그 경기를 본 적도 없고 멕시코 음식을 먹지도 않았습니다. 또 저 때문에 차범근 당시 감독님이 중도 하차하게 된 것 같아 이후 행사가 있어도 찾아뵙질 못했어요. 죄송해서….”

그날은 축구 인생 전체를 통틀어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하 감독이 퇴장당한 날이었다. 첫 골 이후 불과 3분 뒤였던 전반 30분.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하 감독은 자기도 모르게 두 발을 뻗었다. 곧이어 주심의 손에 빨간 카드가 들리자 하늘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한국 선수단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퇴장 이후 TV도 없는 라커룸에서 경기가 끝날 때까지 혼자 앉아 있었어요. 전반까지만 해도 1-0으로 이긴 상태에서 선수들이 들어와 위로도 해줬는데 이후 후반에 밖에서 3번의 함성이 들리는 거예요. 그게 어느 편 함성인지 몰라 온갖 생각이 다 들었죠. 경기가 끝난 뒤 고갤 숙이고 들어오는 동료들을 보자 모든 게 명확해졌어요.”

빠른 발에 정확한 크로스, 공격수 출신으로 골 결정력까지 갖춰 ‘왼발의 달인’으로 불리며 199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풀백으로 주목받던 하석주. 하 감독은 이 경기 이후 팬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요즘처럼 활발하지 않아 다행이다 싶을 정도. 그 대회를 끝으로 대표팀 은퇴까지 고민했을 정도로 심리적으로 위축됐다.

하지만 이후 J리그와 K리그에서 꿋꿋이 활약하며 그 오욕을 씻어냈다. 대표팀에서도 2001년까지 뛰며 ‘한국 풀백의 전설’이란 명성을 남겼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멕시코와의 경기 도중 퇴장당하는 하석주(왼쪽). 대한축구협회 제공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멕시코와의 경기 도중 퇴장당하는 하석주(왼쪽). 대한축구협회 제공
“월드컵에 가면 부담감 많아집니다. 그때 나처럼 흥분해서 퇴장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웃음). 물론, 퇴장을 당하고도 이기는 경우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어쨌든 마음을 가라앉히고 경기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백태클에 가리긴 했지만, 멕시코전에서 넣었던 하 감독의 프리킥 골은 대표팀의 사상 첫 월드컵 선제골이었다. 1991년 6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부터 2001년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까지 95번의 A매치(국가대표 경기)에서 23골을 넣었다. 그중 하 감독이 뽑은 가장 영광스러운 골은 무엇일까.

“2000년 4월 한일 친선 경기에서 1-0 승리를 이끈 중거리 슛 골이 기억에 남아요. 통쾌하게 골망을 갈랐으니까요. (멕시코전 골은?) 뭐. 아시잖아요(웃음).”

20년 만에 월드컵에서 한국과 멕시코전이 재현될 24일 하 감독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한 카페에서 팬들과 함께 경기를 볼 예정이다. ‘하석주 팬파크’로 이름 붙여진 이 행사는 현대자동차가 주최한다. 하 감독은 이날 팬들과 지켜볼 경기에서 자신과 같은 불운의 아이콘이 탄생하지 않길 고대한다.

“월드컵은 한순간에 영웅이 될 수도, 역적이 될 수도 있는 무대예요.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혹시 후배들 중 누군가 실수를 하더라도 팬들이 너무 몰아치진 말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비판 수위가 높아져 선수 가족들도 상처받는 경우들이 생기는데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월드컵에선 VAR(비디오판독시스템)도 도입된다는데 저 같은 후배가 나오지 않길 바랍니다. 역적 대신 영웅이 탄생하길.”

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2018 러시아 월드컵#1998 프랑스 월드컵#하석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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