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54>잠녀, 고단한 바다의 노동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19일 03시 00분


“미역을 캐는 여자를 잠녀(潛女)라고 하는데, 2월부터 5월 이전까지 바다에 들어가 미역을 채취한다… 전복을 잡을 때도 이와 같이 한다. 이들은 전복을 잡아 관가에서 부여한 역에 응하고 그 나머지를 팔아서 의식을 마련하였다. 그러므로 잠녀 생활의 간고(艱苦)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이건(李健)의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

바닷속으로 들어가 해조류와 패류(貝類)를 채집하는 여성을 해녀(海女)라고 한다. 그런데 ‘숙종실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해녀의 의미는 어촌에 살면서 어업에 종사하는 여성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해녀를 조선시대에는 무엇이라 불렀을까? 바로 잠녀(潛女)였다.

잠수를 하면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포작(鮑作)이라 했다. 이원진(李元鎭)은 ‘탐라지’에 포작에 종사하는 남성은 적었고 여성은 많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따라서 당초에 잠업(潛業)에 종사하는 남성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숙종실록’에 따르면 바닷가에서 배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고기잡이에 직접 종사하는 격군(格軍)의 아내를 잠녀라 칭하고, 격군은 아내에 비해 2배 정도의 포작을 관아에 바쳤다고 한다. 특히 ‘남사일록(南槎日錄)’ 1680년 기록에 제주에는 남자의 묘가 매우 적으며 여성은 남성에 비해 3배 정도가 많다는 기록과 함께 딸을 낳으면 부모에게 효도할 사람을 낳았다고 하고, 아들을 낳으면 고래와 자라의 먹이라고 칭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관아의 무리한 요구에 못 이긴 격군과 잠녀들이 도망갔다는 기록이 많은 것을 보면, 당초 남녀 모두 잠업에 종사하였으나 죽음과 도망으로 인해 남아 있는 여성들이 이 일을 모두 떠맡은 것으로 보인다.

어촌에 사는 사람들인 경우 남편은 포작을 비롯하여 선원 노릇까지 해야 했고, 아내 역시 잠녀 생활을 하여 1년 내내 진상할 전복과 미역 등을 마련해 관에 바쳐야 했다. 1702년 조정에 올려진 장계(狀啓)에는 이러한 상황이 목동의 어려움에 비해 10배가 넘는다고 하였으니 노동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 결과 포작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감소하였고, 1695년까지 전복잡이 잠녀는 9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미역을 캐는 잠녀는 약 800명이 있었다. 전복류를 채취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도망가 버리고 나이가 많아 이 일에 종사할 수 없게 되어 전복잡이 잠녀의 수가 점점 감소하자 관리들은 조정에 진상할 상품을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그 대안으로 미역잠녀들에게 전복 1, 2개를 할당해 전복 채취의 기술을 익히게 한 다음 전복잡이 잠녀의 수를 유지하였다.

제주의 어촌 여성들은 누에치기와 솜 타는 일에 종사하지 않았다. 그들은 양태를 들고 망사리를 맺어 미역을 따고 전복 캐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열 살이 되면 이미 잠수 기술을 익혔는데, 이 순간부터 바닷속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기술이 족쇄가 되어 삶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죽어서야 그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은 해녀(잠녀)들이 전복, 해삼, 소라, 문어 등을 따면서 자기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마을 어장은 공유자산으로 적지 않은 경제적 가치를 안겨주고 있지만, 이들의 역사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강문종 제주대 교수
#잠녀#해녀#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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