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며 직장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나 모두 마음이 가벼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소득이 줄어 걱정하거나 부업을 찾아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주 52시간 근무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
▼ 워라밸이 내 삶으로! ▼
“툭하면 밤 11시까지 야근했는데 이젠 오후 6시가 되면 회사 컴퓨터가 자동적으로 꺼집니다. 저녁에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대만 영화를 자막 없이 보고 싶었거든요. 나중에 대만 여행을 가면 제가 좋아하는 대만 배우 진연희 씨를 만날지도 모르니까 더 열심히 공부하려고 해요.”―이준호 씨(35·회사원)
“오후 6시부터 한 시간 동안 스포츠센터에서 수영을 배워요. 원래는 혼자 집에 갔는데 오늘은 아빠가 일이 일찍 끝나서 데리러 왔어요. 앞으로도 가끔씩 아빠가 데리러 와서 스포츠센터 매점에서 맛있는 거 사주면 좋겠어요.”―권모 양(12·초등학교 6학년)
“직장 때문에 체육관에 자주 방문하지 못하던 회원분들이 꾸준히 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번 주에만 네다섯 분이 오랜만에 운동하러 왔어요. 당직 근무가 줄어들어 저녁에 운동할 시간이 생겼다고 해요.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회원분들이 방문하기 시작하니 체육관이 더욱 활기찹니다.”―김준일 ‘종로 바디스타 짐’ 트레이너
▼ ‘머라밸’도 중요해 ▼
“월급이 3분의 1가량 줄었습니다. 생산현장 근로자는 기본급이 높지 않아 수당이 중요한데 갑자기 근로시간만 단축해버리니 임금이 절벽 깎아지르듯 줄었어요. 현장 반장을 맡고 있어 52시간에 맞춰 근무 일정을 짜니 사람들이 ‘돈이 안 된다’며 불만을 토로하더군요. 어린 자녀가 있는 동료는 이미 아이 학원을 줄이고 보험을 해지했더라고요. 뉴스에서 ‘워라밸’하는데, 사실 돈이 있어야 워라밸이 가능한 겁니다. 생활을 위해, 가정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겐 ‘머니 앤드 라이프 밸런스’가 더욱 중요해요. ‘머라밸’이 충족되지 않는데 무슨 워라밸입니까.”―김모 씨(50대·생산관리직 근무)
“이직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직업 특성상 연장이나 야간 근로로 버는 수당이 상당합니다. 승진을 했는데도 올해 초부터 52시간 근무에 들어가 월급이 100만 원 이상 줄었습니다. 이직을 안 하면 대리기사나 일용직 근무 같은 부업을 찾아볼 생각이에요.”―정모 씨(30대·유통업 종사)
“백화점에는 개인사업자가 임차료를 내고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임대 매장이 있습니다. 저는 임대 매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당장은 52시간 근무 대상이 아니라 다행이지만 나중에라도 근로시간이 줄어 월급이 줄어들까 봐 걱정돼요.”―이모 씨(25·백화점 근무)
“근로시간이 줄어드는 건 환영할 일입니다. 문제는 소득 감소와 소득 양극화입니다. 대기업은 대부분 노동조합이 있으니 근로시간 단축으로 줄어드는 소득을 상쇄할 방안을 만들어낼 겁니다. 반면 중소기업은 노동조합도 없고 회사가 영세하니 근로시간이 준 만큼 곧장 근로자 소득이 줄어들어요. 해외건설 산업계 역시 날씨 등 현지 상황과 비용을 고려해 생산성을 맞춰야 하니 ‘주 52시간’을 지키는 데 큰 어려움이 따르죠. 근로시간을 주 단위가 아닌 연 단위로 파악하는 대안이 있습니다. 탄력근로제 적용 기간도 3개월에서 1년으로 늘리는 조치가 필요합니다.”―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
▼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 ▼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됐다고 일자리가 늘어날 것 같진 않습니다. 생산성을 맞추기 위해 회사 시스템이 변하거나 근로자가 더욱 고강도로 일하겠죠. 공무원은 철저히 법을 지켜야 하니 실질적으로 주 52시간 근무제를 시행하겠죠. ‘결국 공무원이 답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취업준비생 사이에서 나올 수밖에 없어요.”―박형정 씨(24·취업준비생)
“긍정적인 반응도 있지만 어차피 일이 몰리면 퇴근하고 잔업을 해야 해 비교적 일이 많은 부서에서 상대적 박탈감이 생긴다는 불만이 나옵니다. 근무시간을 개인이 자율적으로 정하다 보니 협업도 어려워졌어요. 근태관리가 철저해졌고 흡연 등 개인 휴식시간을 근로시간에 포함하는지도 개인 판단에 맡기기 때문에 아직은 혼란스러운 분위기예요.”―박모 씨(31·기업 인사팀 근무)
“회사 규모가 300인 미만이라 아직 주 52시간 근무에 돌입하진 않았습니다. 주 52시간 근무를 실시했을 때 현재 인원과 설비로도 생산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기계화설비 검토, 충원 검토와 같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준비를 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희보다 규모가 작은 곳은 대비조차 힘들다고 하더군요.”―최모 씨(30·생산관리직 근무)
“제조업 현장에서 3조 3교대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당 8시간씩 세 사람이 하루를 맡죠. 주 52시간 근무에 맞춰야 하니 주 6일 동안 하루 8시간씩 일하고 나면 나머지 하루는 4시간밖에 일을 못 해요. 세 사람이니 총 12시간이 비는데, 그 시간을 채우자고 당장 새로운 사람을 뽑을 순 없습니다. 현장에서는 ‘경제가 내려앉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경기 침체를 피부로 느낍니다. 주문량이 늘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4조 3교대로 바꾸자니 비용이 부담돼 어쩔 수 없이 기계를 멈춰놓습니다. 그러면 또 물량 맞추느라 고생하죠. 설문조사에서 주 52시간 근무제에 찬성률이 60% 이상이 나왔다는데, 사무직 종사자들의 이야기입니다.”―김모 씨(54·제조업 근무)
▼ 52시간은 먼 나라 얘기 ▼
“매주 52시간 이상 일합니다. 8시간 근무지만 업무 인수인계를 위해 보통 1시간 빠르게 출근하고 두세 시간씩 더 일해요. 원칙적으로는 주 5일이지만 인력이 부족할 땐 6일 연속 출근합니다. 초과근무수당을 다 받지도 못해요. 보건업은 특례업종으로 분류돼 52시간 적용 대상도 아닙니다. 너무 쉬고 싶어요. 3교대 근무라 대부분이 불면증에 시달리고 심한 사람은 수면제를 처방받아요. 내가 잘못하면 환자가 위험해진다는 두려움이 늘 가슴을 짓누르지만 항상 웃어야 해요. 인력이 부족해 휴가도 못 씁니다. 일이 고되니 신규 간호사들이 그만둬 또 인력이 부족해지는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뉴스에 ‘워라밸’이 나오면 더 서글퍼집니다.”―김모 씨(25·간호사)
“광고업계는 정말 바빠요. 오전 9시에 출근해 12시간 넘게 일하죠. 야근은 일상이고 주말에도 출근합니다. 일이 많을 때는 새벽 4시에 퇴근하는데 말이 퇴근이지 집에 씻으러 들어가는 거예요. 인력이 부족해 디자이너 한 사람당 프로젝트 대여섯 개를 맡아요. 광고 업무는 단기 프로젝트 위주라 업무량이 일정하지 않으니 회사 입장에선 고정 인력을 늘리기 부담스러운 거죠. 이번에 특례업종에서 광고업이 제외돼 주 52시간 근무제 대상이 됐더라고요. 유예기간이 있지만 근본적인 인력부족 문제와 근로환경이 나아지지 않으면 결국 소용없지 않을까요.”―김모 씨(27·광고업 종사)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와 성장률로 따져보았을 때 선진국에 포함됩니다. 이제는 ‘노동’과 ‘삶의 질’에 대해 생각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죠. 생산력의 원동력은 노동력인데 우리나라는 경제발전 과정에서 노동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어요. 기본적으로 경제 성장의 당위성은 결국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있습니다. 생산성이 올라가면 국민들이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하고 인간으로서의 삶과 노동자로서의 삶의 균형이 맞춰져야 하죠. 주 52시간 근무제뿐 아니라 ‘노동’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고 노동자의 교섭권과 자율성이 보장되는 사회를 위한 고민이 필요합니다.”―박영일 인하대 국제통상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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