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58>소금장수 ‘염상’은 큰돈을 벌었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17일 03시 00분


김준근, ‘소금장수’. 프랑스 국립기메박물관
김준근, ‘소금장수’. 프랑스 국립기메박물관
“염전에 가서 소금꾼들과 약정을 하되, 30냥을 염전에 맡겨놓고 3년 동안 소금을 받아다가 장사를 하고 3년 후에는 맡겨놓은 돈을 찾아가지 않겠다고 하면 소금꾼들이 틀림없이 좋아라고 응할 것입니다. 소금을 지고 100리 안쪽을 두루 돌아다니되, 값을 당장 받아낼 일이 아니라 외상을 남겨두어 인정을 맺고 단골로 만들면 반드시 이득이 많을 것입니다.”―‘동패낙송(東稗洛誦)’

예로부터 소금은 매우 중요한 생활필수품이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한반도에서도 제주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의 바닷가에서 소금을 생산했다. 소금을 생산하는 곳을 염소(鹽所) 염장(鹽場) 염전(鹽田)이라 했고, 생산자를 염한(鹽漢) 염간(鹽干) 염정(鹽丁) 염부(鹽夫)라고 했다. 관청에 속한 염부는 염장관(鹽場官)의 관리하에 소금을 생산하고 그 판매 수입으로 생활했다. 민간업자도 비교적 자유롭게 소금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생산된 소금을 운송하여 판매하는 사람들을 염상(鹽商)이라고 했다.

유수원(柳壽垣)의 ‘우서(迂書)’에는 18세기 염상의 실상이 자세하다. 염상은 주로 먹고살기 어려운 빈민으로, 약간의 밑천으로 소금을 사 짊어지고 다니며 팔았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실태를 파악하지 못해 세금 징수가 어려웠다. 소금의 생산과 판매는 많은 이익을 남기므로 국가에서 통제하지 않을 경우 힘 있고 돈 많은 자들이 독점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생산은 국가가 주도하고, 거대 자본을 소유한 중간상인이 수레나 배로 전국 각지로 운송한 뒤 소규모 염상이 짊어지고 다니며 판매하는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유통 방안이었다. 이렇게 하면 국가 재정 확보에 도움이 되고 가격을 공정하게 정할 수 있다. 아울러 염상이 안정적인 수입을 얻고 백성이 편리하게 소금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 유수원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제안을 국가가 얼마나 수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소금 방문판매업자로서 염상의 활동은 매우 활발했던 것 같다. 서울만 하더라도 도성 안에 있었던 내염전, 용산염전, 마포염전, 이현에 있었던 경염전 등 4곳이 있었으며 소금 상인 중에는 거상이 많았다. 한양에 유통된 소금이 무려 수십만 섬 이상으로 추정되고, 주로 생산지에서 선박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운송하고 염상에 의해 민간에 판매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염상들의 활동은 구비문학과 야담 등에 그대로 수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노명흠(1713∼1775)의 ‘동패낙송’에 실려 있는 ‘염상으로 부자가 된 김 서방 이야기’가 가장 대표적이다. 소금을 짊어지고 돌아다니며 외상으로 판매해 단골을 만든 김 서방은 3년이 지나자 3000냥을 벌었다. 다시 3년이 흐르자 김 서방은 부자가 됐다.

하지만 이는 다소 과장된 이야기다. 소금은 인삼이나 담배처럼 이득이 많이 남는 상품은 아니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생필품이다. 따라서 염상은 많은 자본이 필요 없었고, 신체가 건강하고 성실하기만 하면 판로를 확대할 수 있었으므로 서민들이 직업으로 삼기 충분했다.
 
강문종 제주대 교수
#소금장수#염상#세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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