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이 쪽(윤정희) 하숙집과 저희 집 딱 중간이었거든요. 다른 곳 가서 데이트 할 필요가 없었어요. 이름부터 너무 마음에 들잖아요. 예술의 다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과 에꼴 드 보자르(고등예술대학) 사이에 놓인 예술의 다리(퐁데자르·Pont des arts)는 센강 사이에 놓인 37개 다리 중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꼽힌다. 왼쪽으로는 시떼섬이, 오른쪽으로는 저 멀리 에펠탑이 보인다.
백건우는 루브르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가리키며 “45년 전 연애를 할 때 이 곳을 왔다 갔다 했지요”라고 말했다. 윤정희의 하숙집은 루브르 박물관 옆, 백건우의 집은 생제르망데프레 쪽에 있었다. 연애 시절 두 집 가운데인 예술의 다리에서 늘 아쉽게 헤어졌다.
두 사람은 다리 위에서 무엇을 하며 연애를 했을까. 백건우는 “뭐 하긴 뭘 해요. 풍경 보는 거죠”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두 사람이 뭘 하는지 지켜봤다.
“오리가 있네”
윤정희가 다리 밑을 내려다보며 핸드백 안에서 작은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어디” 하고 곁으로 온 백건우도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백건우는 “나는 이 쪽 시떼섬이 좋더라”며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윤정희는 “어머, 환한 해 좀 봐” “유람선이야. 자기야 이리 와. 유람선 지나간다”고 남편을 불러댔고, 연신 사진을 찍었다.
두 사람의 취미는 사진 찍기다. 각자 풍경을 찍고 나서는 서로에게 “이거 보라”며 자랑했다. 어김없이 “정말 예쁘다”는 맞장구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함께 했다.
백건우의 사진 취미는 미국 뉴욕 고등학생 시절부터 생겼다.
“사진이 예술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푹 빠졌어요. 침대 한 칸 밖에 없는 좁은 방에서 밥을 굶으면서도 돈을 아껴 중고품 라이카 카메라와 현상기를 사서 밤마다 현상했어요. 아마 외로워서 그랬던 것 같아요”
15세의 나이에 시작한 백건우의 미국 생활은 배고픔과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백건우가 그 때 이야기를 꺼내자 윤정희는 수차례 “정말 그랬어? 나도 몰랐네”라며 놀라워했다.
1961년 한양공고 1학년생 백건우는 아버지와 함께 생애 첫 비행기를 탔다.
뉴욕에서 열리는 제1회 드미트리 미트로폴리스 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개인 돈으로는 해외에 나갈 엄두도 못 내던 시절. 서울에서 예선을 거쳐 뽑힌 백건우는 젊은 음악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한미재단의 도움으로 콩쿠르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인생 첫 해외여행인가요.
“그렇죠. 당시 직항이 없어서 부산 도쿄 하와이 로스앤젤레스(LA)를 거쳐 며칠 걸려 뉴욕에 갔어요. 서울에서 부산 갈 때는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간 기억이 나요.”
-원래 콩쿠르 이후 계속 미국에 살 생각이었나요.
“전혀요. 그러기를 바랐지만 불가능했죠.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어요. 재단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와 함께 다녀올 경비도 간신히 마련했어요.”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콩쿠르 끝나고 돌아오려고 할 무렵 콩쿠르 주최자인 한나 색슨이 백건우에게 “뉴욕 아트 스쿨에 다니면서 피아노 공부를 계속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해 왔다. 줄리어드 음대의 세계적인 피아노 교수 로지나 레빈도 소개했다. 레빈 교수는 크라이번, 존 브라운, 딕 히터 등을 키워낸 최고의 피아노 조련사였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저도 내막을 25년 후야 우연히 알게 됐어요. 미국 마이애미 협연을 갔다가 우연히 한나 색슨을 다시 만났어요.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데 ‘너 혹시 25년 전 콩쿠르에서 발코니에서 나와 이야기하던 사람 기억나니’라고 묻더군요.”
백건우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콩쿠르 도중 카네기 리사이틀홀에서 라흐마니노프 3장 1악장을 연습하고 있을 때 한나 색슨과 한 신사가 발코니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옆에 있던 신사가 세계적인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제 연주를 듣고 한나 색슨에게 ‘당신이 책임지고 키우라’고 했대요. 번스타인이 없었다면 저는 영락없이 서울로 돌아왔겠죠.”
● “외로움, 그게 나를 미치게 해”
뜻하지 않게 가족 없이 홀로 미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배고픔과 외로움이었다.
-영어는 할 줄 알았습니까.
“아뇨. 처음에 도착했을 때는 예스와 노도 헷갈리는 수준이었어요.”
-기숙사에서 살았나요.
“아뇨. 방 한 칸 얻었는데 침대 하나 넣으면 꽉 차는 작은 방이었어요. 전기 곤로 하나 놓고 밥은 계란 하나 풀어서 먹었죠. 오페라, 발레 연습에 반주해주고 용돈을 벌었어요.”
윤정희가 옆에서 “그래도 라두사라고 돈 많은 여자가 도와줬잖아”고 하자 백건우는 “그 사람은 나를 이용했을 뿐이지 난 그 사람 생각만 하면…”이라고 손을 내저었다.
백건우는 ‘25불의 굴욕’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 여자는 집에 모임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저를 자기 자식이라고 소개하며 피아노를 치게 했어요. 제 후원자 행세를 한거죠. 많은 사람들이 저를 금전적으로 도와주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돈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어요. 한 번은 제가 거의 일주일을 굶고 너무 배가 고파서 찾아갔어요. 25불만 빌려달라고 했죠. 그런데 그 돈 많은 부자가 한참 생각을 하더니 저를 후원해주는 한미재단에 보낼 테니 그 쪽에서 받으라고 하더군요. 세금을 안 내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나는 죽어가고 있는데…”
윤정희가 “그래서 받았어? 그걸 왜 받아”라고 외쳤다. 백건우는 “그만두라고 하며 나왔죠. 인간으로 안 보이더라고요.”라고 인상을 찌푸렸다.
백건우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배고픔보다 더 힘든 건 외로움이었어요. 그게 사람을 미치게 해. 좋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부모를 대신할 수는 없잖아요. 공허함을 채울 수가 없었어요. 저 자신에 대한 확신도 없어서 음악인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는데도 참 오래 걸렸죠.”
-영화감독을 꿈꾸기도 했다면서요.
“내 예술성에 맞는 직업이 무엇인가 고민이 많았어요. 피아노가 두려웠기도 했고. 뉴욕은 전 세계 모든 영화를 다 볼 수 있었거든요. 외로워서, 세계 문화를 접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인간의 삶을 볼 수 있어서 사진과 영화에 푹 빠졌죠.”
-중간에 음악을 포기할 생각은 안 했나요.
“한창 힘들 때 값지고 신비한 체험을 했어요. 건물 8층 방 한 칸에서 하숙할 때인데, 저 자신에 대한 확신도 없고, 몸도 안 좋았어요. 굉장히 추운 겨울이었는데 뉴욕 20가에 있는 병원에서 80가 집까지 걸어왔어요. 인생의 한치 앞도 안 보였죠. 집 안에 들어왔는데 창문 바깥으로 햇빛이 화사하게 비치더니 옆 건물에서 소리가 들려요. 영어로 ‘come over here(이리와)’ ‘come over here(이리와)’. 나도 모르게 창문을 열었어요.”
듣고 있던 윤정희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창문틀에 걸렸는데 그대로 기절을 했어요. 깨어나니 시커먼 밤이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나에게는 부활이었던 것 같아요. 악마가 창 밖으로 나를 불렀지만 수호천사가 그걸 막아준 것 같은 느낌. 그 이후부터 사소한 걱정은 싹 사라졌어요. 나를 완전히 바꾼 모멘텀이었죠.”
● 나를 키워준 인생의 스승
뉴욕 아트 스쿨을 졸업한 백건우는 줄리아드 음대에 입학했다.
-돈이 없는 고등학생 시절 어떻게 레빈 교수에게 레슨을 받았나요.
“저는 한 번도 레슨비를 드린 적이 없어요. 오히려 대학 때는 학교에 이야기해서 장학금을 받게 해주셨죠. 어느 날은 저한테 ‘생활이 괜찮냐’고 물어요. 솔직히 ‘힘들다’고 말했더니 곧바로 수표 25달러를 주셨어요. 밥 사먹으라고요. 그것도 하필 딱 25달러였네요.”
-그 분이 왜 그렇게까지 하셨을까요.
“제 음악을 참 아껴주셨어요. 제 심리도 너무 잘 아는 분이셨죠. 레슨 받으러 댁에 가면 ‘몸 풀고 있어’라고 말하시곤 안방에서 화장하고 옷을 챙겨 입고 나오세요. 어느 날 유난히도 피아노치기 싫은 날이었어요. 제가 봐도 형편없이 치고 있는데 안방에서 나오시면서 ‘너는 참 훌륭한 피아니스트야’하고 칭찬을 하시는 거에요. 마음이 사르르 녹으면서 연주가 그냥 풀렸죠. 5년이 지나 이제 레빈 선생님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자극이 필요한 것 같아 헝가리 출신의 일로나 카봇 선생님께 배우겠다고 했죠,”
-그렇게 잘해줬는데 레빈 교수가 섭섭해 하진 않았나요.
“그게 더 기가 막혀요. 힘들게 말씀 드렸더니 레빈 교수님이 ‘네가 카봇 선생에게도 배울 점이 있을 거야. 하지만 아직 나한테 배울 것도 더 있어. 카봇 선생에게 내가 계속 가르쳐도 되나 물어봐’라고 하시는거에요. 그래서 두 선생에게 레슨을 받았어요. 엄청난 운이죠. 세계적인 두 분이 서로 전화해서 백건우의 요즘 연주 어떻게 생각하냐고 상의도 했어요. 카봇 선생 역시 레슨비가 비싸기로 유명한 분인데 저에게는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어요.”
-전설의 피아니스트 빌헬름 캠프에게도 스승이죠?
“빌헬름 캠프도 레빈 선생이 추천해서 만나게 된 거에요. 그 분은 해마다 2주 동안 하루 종일 베토벤 소타나 32곡과 협주곡 5곡 전곡을 학생들이 치는 걸 듣고 본인도 쳤어요. 한 음 한 음을 성스럽게 생각했죠. 음악을 대하는 자세를 배웠어요. 한 번은 시계를 찬 채로 피아노를 쳤다가 크게 혼나기도 했죠.”
-유학 시절인 60, 70년대는 미국인들은 한국을 잘 모를 때죠.
“전혀 모르죠. 어느 날 뉴욕에서 버스를 탔는데 운전기사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요. 제가 되물었어요. 어느 출신 같은지. 그 기사가 일본 중국부터 시작해 인도 베트남까지 10개 가까운 동양 국가 이름을 댔는데 끝까지 한국은 안 나오더라고요. 그건 그나마 양반이에요. 한 번은 흑인 취급하며 버스 기사가 이유 없이 내리라고 한 적도 있어요.”
-집이 그리울 때는 없었나요.
“이탈리아에서 서머캠프에 참여하고 있을 때인데, 하루는 저녁에 호텔 로비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어머니 품 안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어요. 눈물날 정도로.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그리운 대상이 어머니 뿐 아니라 한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1972년 뉴욕 튤리홀에서 한 라벨 피아노 전곡 독주는 그에게 분수령이 됐다. 뉴욕타임스가 그 공연을 “대가도 해내지 못한 엄청난 연주”라며 극찬했다.
“라벨에 흠뻑 빠져 있을 때였거든요. 음악인들이 그러죠. 제가 음악을 선택한 게 아니라 음악이 저를 선택했다고. 그럴 때였죠. 그래서 전곡을 하룻밤에 연주했거든요. 뉴욕타임스에 소개 되고 그 프로그램으로 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 독주회를 했죠.”
이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자리 잡은 백건우는 1970년대 파리, 80년대 영국, 90년대 이후 동유럽, 러시아, 최근 중국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연주를 하고 있다.
< 8일 마지막 5회는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인생관과 백건우 윤정희를 인터뷰하며 느낀 에필로그를 전해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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