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에서 아랍어까지… 한 획 한 획, 쓰는 맛 보는 멋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22일 03시 00분


[컬처 까talk]‘손글씨의 귀환’ 캘리그래피 붐
특정분야 디자인서 대중 취미로… 최근엔 독립 장르로 인정받아
학생부터 노인까지 전문학원 북적… 취미공유 앱-SNS 모임 급증
필사 시집 등 출판가서도 인기몰이

이산글씨학교(서울 마포구) 수강생들이 자신의 이름을 개성 있게 표현한 캘리그래피 작품을 들고 있다. 이들은 “상대의 이름이나 간단한 문구를 적어 캘리그래피를 선물하면 예술작품을 나누는 기쁨도 있다”고 말했다. 이산글씨학교 제공
이산글씨학교(서울 마포구) 수강생들이 자신의 이름을 개성 있게 표현한 캘리그래피 작품을 들고 있다. 이들은 “상대의 이름이나 간단한 문구를 적어 캘리그래피를 선물하면 예술작품을 나누는 기쁨도 있다”고 말했다. 이산글씨학교 제공
“한 획, 한 획 글자의 의미를 생각하며 만든 캘리그래피(Calligraphy)를 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을 느낍니다. 펜과 종이만 있으면 되니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요.”

대학원생 황의현 씨(30)는 요즘 캘리그래피에 푹 빠져 있다. 그의 캘리그래피 작업이 특별한 이유는 한글이나 영어가 아닌 아랍어로 쓴다는 것이다. 황 씨는 “아랍어 글씨는 수많은 점들을 균형감 있게 배치해야 하고 고정된 형태를 벗어나 예술적으로 크게 변형할 수 있는 게 매력이다”며 “1∼2시간 동안 몰입해 완성한 캘리그래피는 내게 소중한 예술작품”이라고 말했다. 황 씨는 캘리그래피 동호회 활동을 하며 페르시아어의 글씨체인 ‘파르시’체도 연습하고 있다.

아랍어 캘리그래피는 ‘낙타를 묶었으니 이제 신에게 맡겨라’는 문구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과 같은 의미다. 이산글씨학교·황의현 김종훈 씨 제공
아랍어 캘리그래피는 ‘낙타를 묶었으니 이제 신에게 맡겨라’는 문구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과 같은 의미다. 이산글씨학교·황의현 김종훈 씨 제공
김종훈 씨(28)도 아랍어 캘리그래피 작품을 만든다. 어학 연수로 튀니지에 머무는 동안 일종의 서예학원에 다니며 취미로 아랍어 캘리그래피를 배웠다. 지난해까지는 관심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무료 강습도 했다. 김 씨는 “취직이나 경력 개발과 관련된 활동은 아니지만 삶이 힘들 때마다 펜을 집어 들고 정성스레 글자를 쓰면 자존감도 높아진다”고 했다. 그는 노래 가사, 좌우명 등을 아랍어로 번역해 작품을 만든다.

컴퓨터, 스마트폰에 익숙해져 좀처럼 펜을 쓸 일이 없어진 시대에 펜을 잡고 손으로 자신이 원하는 문구를 쓰는 캘리그래피가 각광받고 있다. ‘쓰기의 귀환’인 셈이다.

캘리그래피는 약 20년 전 유명 소설가들의 책 표지 제목 디자인으로 사용되면서 대중적으로도 인지도를 얻은 뒤 꾸준히 발전해 오늘날 제품 브랜드, TV 드라마·다큐멘터리 제목, 생활용품 디자인에 활용되고 있다. 한때 한글이나 알파벳을 예쁘게 쓰는 정도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독립된 예술 장르로 인정받으며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아랍어 캘리그래피를 비롯해 스케치, 드로잉과 결합한 캘리그래피가 인기를 모으고 있으며 작업 도구도 만년필, 색연필, 붓펜, 초크펜, 마커펜 등으로 다양하다.

과거에는 광고, 디자인 분야 종사자들이 캘리그래피를 주로 배웠지만 요즘에는 취미로 캘리그래피를 배우려고 전문학원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서울과 제주에서 필묵아카데미를 운영하는 김종건 대표는 “취미로 캘리그래피를 배우는 사람들이 수강생의 20%에서 최근 절반까지 늘었다”고 했다. 취미활동을 공유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립’에만 캘리그래피 관련 활동이 100여 개에 이른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소규모로 캘리그래피 작품을 공유하는 모임이 많다.

연령대도 다양하다. 이산글씨학교를 운영하는 이산 작가는 “중고교생부터 70대까지 매주 수강생 60여 명이 강의를 듣는다”고 말했다. 취미로 시작해 전문 자격증까지 취득하려는 수강생도 적지 않다고 한다.

위부터 롤링펜으로 작업한 ‘그대 꽃필 것’, ‘책은 시공을 초월한 통신이다’를 표현한 캘리그래피 작품. 이산글씨학교·황의현 김종훈 씨 제공
위부터 롤링펜으로 작업한 ‘그대 꽃필 것’, ‘책은 시공을 초월한 통신이다’를 표현한 캘리그래피 작품. 이산글씨학교·황의현 김종훈 씨 제공
영문 캘리그래피가 한때 큰 인기를 끌었는데, 최근에는 한글 캘리그래피가 더 각광을 받고 있다. 이산 작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한글은 개인 취향에 따라 자기만의 글씨체를 만들기도 더 쉽고, 무한한 변형도 가능한 게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김종건 대표는 “한글 캘리그래피를 배우기 위해 스위스, 독일, 영국에서 오는 외국인 수강생도 적지 않다”고 했다.

손글씨의 인기는 도서 시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출판계에 따르면 시를 필사할 수 있도록 만든 ‘필사 시집’이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TV 드라마에 등장했던 필사 시집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김용택 지음·예담)는 2015년 첫 출간 이래 81쇄를 찍었고, 현재 3권까지 출간됐다. 윤동주 시인의 시를 필사할 수 있는 책도 시인의 탄생 100주년(2017년)을 즈음해 여러 권이 출간됐다. 자신의 생각을 손으로 쓸 수 있도록 디자인한 각종 다이어리북도 사랑받고 있다.

김기윤 pep@donga.com·조종엽 기자
#캘리그래피#이산글씨학교#손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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