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려는 그때 화웨이 장비가 고장 났다면 추가근무를 해서라도 응대해야 한다. 화웨이 직원은 어려움이나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정신을 갖고 있다. 중국에선 ‘분투(奮鬪)’라고 한다.”
세계 통신장비 1위 기업이자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미국 애플과 2위 자리를 다투는 중국 화웨이의 궈핑 순환회장은 17일 중국 선전 본사에서 한국 기자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해가 지고 오후 8시부터 화웨이 본사 1층 로비엔 수십 개의 야식 상자가 쌓였다. 테이블 위로 빵과 음료, 간편식이 늘어섰다. “야근하는 분들을 위해 마련되는 야식”이라고 화웨이 관계자는 말했다. 낮과 다름없이 대부분의 사무실엔 불이 켜져 있고 직원들도 바쁘게 오갔다. 창업 초기 화웨이의 상징이던 접이식 야전침대도 여전히 사무실 곳곳에 놓여 있었다.
화웨이는 직원들의 ‘996(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근무)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한 대표적 사례다. 각지에 초기 통신망을 깔던 작업자들이 야전침대를 펴고 현장에서 잠을 잤다. 징둥닷컴 알리바바 샤오미 등 굴지의 중국 정보기술(IT) 기업의 신화 이면에 직원들의 희생이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분투 정신은 경영자가 나서 자랑할 일이 아닌 듯하다. 오히려 기업 이미지를 깎아먹거나 우수 인력을 유치하는 데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구호이기도 한 이 분투 정신이 글로벌 기준에 눈뜬 중국 2030 밀레니얼 세대에겐 ‘억압’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1일 마윈 알리바바 회장의 “‘996’을 할 수 있는 것은 복이다” 발언 이후 중국인 개발자들이 글로벌 개발자 커뮤니티인 깃허브에 ‘996.ICU’ 사이트를 열고 초과근무 고발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996.ICU는 ‘996 근무하다 중환자실(ICU)에 실려 간다’는 풍자다.
중국 밀레니얼 세대의 도전은 국경을 넘어 지지를 얻고 있다. 22일(현지 시간) 구글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IT 기업 개발자 100여 명이 996.ICU 캠페인을 공개 지지하는 글을 올렸다.
분투 정신은 분명 중국 IT 기업들을, 나아가 중국 경제를 지탱해 온 성공의 기반이었다. 마윈 회장 본인은 “‘12·12(하루 12시간씩 1년에 열두 달 근무)를 했지만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회사와 함께 성장하는 것이 개인의 미덕이었던 시대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가치도 달라졌다. 밀레니얼 세대는 ‘996 블랙리스트 기업’을 작성해 공유하고 있다. 상시 초과근무 체제인 기업은 더 이상 바람직하지도, 정상적이지도 않다.
인공지능(AI), 클라우드 등 미래 산업에서 개발 인력 유치 경쟁은 이미 국경을 넘어섰다. 지불받지 않는 근무를 희생으로 포장하는 기업은 매력적인 일자리가 아니다. 기존의 잘못된 관행 타파와 인력 운영 효율성 제고를 위한 IT 기업의 고민이 시작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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