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상대 ‘론스타 소송’ 금명 결론
2003년 8월 ‘16년 악연’ 시작
론스타, 5조원대 ISD제기 반격… 되살아난 ‘론스타 유령’
“론스타(제소 결과)가 곧 나옵니다.”
지난해 가을 한 금융권 관계자가 이렇게 귀띔해줬다. 정부는 물론 정치권이 발칵 뒤집힐 것이란 예고와 함께. 도대체 언제 적 론스타란 말인가. 2012년 11월 한국 정부에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한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 얘기였다. 론스타는 한국 정부에 ISD를 제소한 첫 상대였다.
론스타가 우리 정부에 요구한 손해배상 금액은 46억9000만 달러(약 5조1000억 원). ISD 사상 역대 최대 규모여서 한국뿐 아니라 세계가 함께 주목하고 있다. 정부가 1조 원이라도 물어주는 것으로 결과가 나오면 ‘론스타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야 할 판이다. 국민 혈세를 크게 헐어줘야 하니 정부도, 정치권도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정부 및 금융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판정부인 ICSID와 소송 당사자들은 지난해 11월 “소송 절차를 종료한다”고 선언할 예정이었다. 선언일로부터 최장 180일 뒤 선고가 내려지니 정부도 관련 보도자료를 미리 써두며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선언이 나온다고 한 지 5개월이나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다. 물론 그 선언은 당장 내일이라도 벼락같이 나올 수 있다. 폭풍전야 같은 상황이 벌써 몇 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 16년의 질긴 악연
정부와 론스타의 악연은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론스타는 2003년 8월 외환은행 지분 51%를 1조3834억 원에 사들여 최대주주가 됐다. 외국 자본이 기업가치를 키워줄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해외 사모펀드가 헐값에 국내 대형은행을 삼켰다”는 논란이 더 거셌다. 산업자본인 론스타에 외환은행 인수를 허용한 건 은산분리 규정을 위배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론스타는 인수 3년 만인 2006년 외환은행을 영국계 은행 HSBC에 되팔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론스타가 시세차익을 얻고 튀려 한다”는 ‘먹튀’ 논란에 불이 붙었다. 국회 재정경제위원회는 “2003년 외환은행 매각이 불법이었다”며 매각 관련자들을 검찰에 고발했고, 감사원도 감사에 착수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같은 해 12월 “외환은행 매각 과정에서 변양호 전 재경부 금융정책국장과 이강원 전 외환은행장 등이 론스타와 유착됐다”며 “외환은행 자산을 고의로 저평가하고 부실을 부풀려 정상 가격보다 싸게 매각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이즈음 외환은행이 2003년 외환카드를 합병하는 과정에서 외환카드의 감자(減資)설을 퍼뜨려 주가를 고의로 떨어뜨린 혐의에 대해서도 수사를 시작했다. ‘투기 자본’으로 찍힌 론스타에 대해 검찰과 금융당국, 감사원 등 권력기관의 압박이 본격화된 것이다.
론스타는 출구전략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론스타는 2007년 9월 HSBC에 외환은행 지분 51%를 63억1700만 달러에 팔기로 계약했다. 하지만 정부가 순순히 길을 내줄 리 없었다. 금융감독위원회는 “론스타가 재판을 받는 중이라 승인할 수 없다”며 계속 버텼다. HSBC는 결국 외환은행 인수를 포기했다.
론스타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엇갈렸다. 일단 헐값매각 의혹은 정책적 판단이기 때문에 처벌이 어렵다고 봤다. 2010년 10월 대법원은 변 전 국장과 이 전 행장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론스타는 바로 다음 달인 11월 하나금융지주와 지분 매매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외환카드 주가조작 혐의에 대해서는 법원이 최종 유죄 판결을 내렸고 론스타는 외환은행 대주주 자격을 상실했다. 금융위는 론스타에 “6개월 안에 외환은행 주식을 조건 없이 처분하라”고 명령했다. 하나금융은 2012년 1월 당초 계약대로 외환은행을 론스타로부터 인수했다. 론스타가 8년 만에 한국을 떠난 순간이다. ○ 정부는 함구, 소문은 난무
그렇게 잊혔던 론스타는 2012년 11월 다시 뉴스 헤드라인에 등장했다. 한국 정부를 상대로 ICSID에 ISD를 제기한 것이다. 론스타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한국 정부가 외환은행 매각 절차를 질질 끄는 바람에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론스타는 하나금융과 2010년 11월 매매계약을 맺었지만 1년 2개월간 승인이 지연됐다. 이 기간 최종 매각대금이 8000억 원 가까이 줄었다.
또 하나는 한국 정부가 투자수익금에 부당하게 세금을 물려 손해를 봤다는 주장이다. 한-벨기에 조세조약에 따라 론스타가 거주지로 돼 있는 벨기에에서 세금을 내야 하는데, 한국 국세청이 8500억 원을 징수했다는 것이다.
우선 매각 지연에 대해 한국 정부는 “재판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승인을 낼 수 없었다”고 맞서고 있다. 국제 중재 분야의 한 변호사는 “론스타가 투자한 뒤 수익을 내고 떠나는 건 보장해줘야 하지만 형사적인 문제가 있는데 ‘잘 가세요’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세금 징수에 대해서는 국세청은 “론스타가 벨기에에 세운 것은 페이퍼컴퍼니”라며 “그래 놓고 론스타는 국내 부동산 등에 투자해 4조6000억 원을 챙겼다”고 반박했다.
양측의 공방은 3년 넘게 이어졌다. 최종 진술은 2016년 6월 끝났다. 그 후 지금까지 판정부는 묵묵부답이다. 관련 부처에 왜 판정이 안 나오는지 물으면 ‘모른다’는 답뿐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판정부에 지연 이유를 물었다가 판정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계속 함구하니 확인되지 않는 루머가 난무한다. 법조계에선 “판정을 맡은 중재인 중 한 명이 고령인데 병에 걸려 판정문 작성이 지연된다”는 풍문이 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배상 판정이 늦게 나오면 배상금에 붙는 이자가 늘어나고 이게 다 국가의 비용”이라며 “정부가 책임론을 피하려 론스타와 짜고 발표 시기를 늦추는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 론스타 유령 되살아나나
론스타가 한국에 건 국제 분쟁은 이뿐이 아니다. 론스타는 2016년 8월 하나금융을 상대로도 “14억430만 달러(약 1조5700억 원)를 배상하라”며 국제상공회의소(ICC)에 소송을 제기했다. 하나금융이 론스타에 “매매가를 인하하지 않으면 정부가 매각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며 협박했다는 이유다. 이 분쟁의 판정은 이미 발표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돈다. 그 시기가 4월 말∼5월 초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면서 금융권이 술렁이고 있다.
‘론스타 vs 한국 정부’의 판정이 지연되는 이유를 두고 국제중재업계에선 ISD 판정부가 ‘론스타 vs 하나금융’ 판정을 참고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 변호사는 “ISD 판정부가 지난해 11월 절차 종료를 선언하려다 마침 하나금융에 대한 ICC 소송의 최종변론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결과를 지켜보려 판정을 미루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만약 하나금융이 패소해 돈을 토해내야 하면 정부의 배상액은 다소 줄어들 수 있다. 론스타가 정부에 요구한 손해배상액 중 하나금융이 부담할 금액이 겹치기 때문이다.
론스타에 대한 국제분쟁 판정이 임박하면서 우리 사회에 ‘론스타 유령’이 되살아나는 모양새다. 한국 정부나 하나금융이 배상금을 일부라도 물어줘야 하면 이에 대한 책임 공방이 불가피해진다. 이에 대한 국정조사, 감사원 감사 등이 되풀이될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금융권에서는 론스타 리스크 때문에 누가 장관 후보에서 낙마했다느니, 누가 책임지고 옷을 벗기로 돼 있다느니 하는 얘기가 무성하다. 노무현 정부 이후 세 번의 정권 교체를 거친 오래된 사건인 만큼 웬만한 고위 경제관료 중에는 론스타 책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거의 없다. 정치권에서는 누구 잘못이 더 컸는지를 놓고 여야가 또다시 사생결단을 낼 것이다.
시시비비는 가리되 다툼은 짧았으면 좋겠다. ‘론스타의 덫’에 걸려 있던 시간은 지난 16년만으로도 충분하다. 론스타 사태가 터진 게 한참 전인데 관련 부처에는 아직도 ISD 전문가가 부족하고, ISD 관련 협정 개정 움직임도 더디다. 언제든 ‘제2의 론스타’가 한국 정부의 허를 찌를 수 있는 일이다. 론스타 판정 이후 소리만 요란한 푸닥거리만 했다간 지난 16년이 너무도 뼈아프게 남을 것이다.
:: 투자자-국가 간 소송 (ISD·Investor-State Dispute) :: 외국인 투자가가 투자 대상국의 정책이나 법령으로 피해를 봤을 때 해당국 정부를 상대로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제소하는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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