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0일 오전 9시 서울 강남구 디에이치자이 개포 재건축 현장. 공사장 앞 식당에서 라면을 먹던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조합원 A 씨가 주먹으로 식탁을 치며 말했다. A 씨와 동료 조합원 3명은 이날 일을 하기 위해 출근했지만 현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소속 건설노조 조합원 50여 명이 “우리 조합원만 고용하라”며 출입게이트를 막아섰기 때문이다. 끝내 공사장에 들어가지 못한 A 씨 일행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민노총의 동향만 살피다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한국노총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지난달 27일 새벽 한국노총 소속 조합원 B 씨는 “우리 조합원도 같이 고용하라”고 요구하며 이 현장의 타워크레인을 기습 점거했다. 고공농성은 사흘간 이어졌고, 국회의원들까지 중재에 나서 “한국노총 조합원도 고용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에야 B 씨는 크레인에서 내려왔다.
양측의 갈등은 급기야 물리적 충돌로 이어지기도 했다. 4월 23일 양대 노총 조합원 1000여 명이 집회를 열어 12시간 가까이 대치하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일어나 한 명이 병원으로 이송됐다. 지난달 9일엔 두 노조가 소화기를 뿌리며 충돌해 13명이 다쳤다. 이 현장뿐만 아니라 전국의 공사 현장 곳곳은 최근 두 노조의 ‘일자리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 건설현장은 ‘노조 천국’
양대 노총이 폭력까지 서슴지 않으며 싸우는 가장 큰 원인은 일자리다. 현 정부 들어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등이 줄면서 지난해 7∼9월 전년 동기 대비 건설투자 증가율은 외환위기 이후 최저치(―6.7%)를 기록했다. 올해 1∼3월(―0.8%) 증가율 역시 마이너스다.
건설 투자가 줄어들자 건설 일자리도 줄었다. 건설업 취업자는 올해 1월과 2월 전년 동월 대비 각각 1만9000명, 3000명 감소했다. 3월엔 반짝 상승했지만 4월엔 취업자가 다시 지난해보다 3만 명 줄었다. 일감이 줄어드니 일자리를 사수한다는 명목으로 공사 방해도 서슴지 않는 ‘일자리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민노총 건설노조는 아예 자신들의 조합원만 채용하는 단체협약을 맺자고 건설업체들을 압박한다. 특정 노조의 조합원만 채용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다. 하지만 건설노조는 막무가내로 이를 요구한다. 만약 건설사가 이를 거부하면 현장마다 집회를 열고 공사를 방해한다. 출입문을 막고 자기 소속이 아닌 근로자의 출입을 막는가 하면, 합법적 체류 여부를 확인하겠다며 외국인 근로자의 신분증을 검사한다. 건설노조의 이런 압박에 ‘약자’인 건설업체들은 어쩔 수 없이 단협을 체결할 수밖에 없다고 호소한다.
실제 타워크레인조합은 2017년 건설노조와 이런 단협을 맺었다가 이사장 한모 씨가 노조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벌금 200만 원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한 씨가 특정 노조 조합원만 채용하는 ‘부당노동행위’를 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정작 단협의 또 다른 당사자인 건설노조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현행 노조법이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만 인정하고 노조의 부당노동행위는 인정하지 않아서다. 결국 형사처벌에서 자유로운 건설노조가 이런 불법 단협을 체결하라고 사측에 계속 강요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2017년 건설노조와 같은 내용의 단협을 체결한 또 다른 업체 관계자는 “민노총이 다른 건 몰라도 조합원 채용만큼은 끝까지 사수하려고 한다”며 “전국 어디든 붉은 띠를 두른 노조원들이 있다”고 말했다.
○ 일자리 위기에 양대 노총 ‘공동 투쟁’도
벼랑 끝 전쟁을 벌이던 양대 노총이 최근 돌연 손을 잡은 적도 있다. 양대 노총 타워크레인 노조는 전국 건설현장의 대형 타워크레인 2500여 대를 점거하며 이틀간 파업을 벌였다.
표면상으로는 임금협상 결렬이 이유였지만, 핵심 갈등은 소형 타워크레인이었다. 소형 타워크레인이 안전사고가 잦으니 아예 쓰지 못하게 해달라는 게 양대 노총의 주장이다. 그러나 두 노조 조합원은 대부분 대형 크레인 기사인 반면 소형 크레인은 비노조원이 많다. 건설업계가 소형 타워크레인을 많이 쓸수록 양대 노총 조합원은 일자리를 잃게 되는 구조다. 전쟁을 벌이던 양대 노총이 기술의 발달로 일자리가 위협받자 ‘휴전’을 선언하고 손을 맞잡은 것이다.
양대 노총은 국토교통부로부터 소형 크레인의 안전 규제를 강화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에야 5일 파업을 중단했다. 그러나 향후 구성될 협의체의 협상 결과에 따라 갈등이 다시 불거질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양대 노총이 국토부와의 합의를 ‘잠정 합의’라고 표현한 것 역시 향후 언제든 파업에 나설 수 있다는 ‘경고’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다.
○ 뒷짐 지고 눈치 보는 정부
전국의 공사 현장이 이렇게 몸살을 앓고 있는데도 정부는 아직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노조법상 위법 단협을 맺은 노조를 부당노동행위로는 처벌할 수 없어도 시정명령 불응(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으로는 처벌할 수 있다. 고용노동부는 건설노조가 타워크레인조합과 맺은 단협에 대해 지난해 10월 시정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노조는 여태껏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있고, 고용부는 추가 조치 없이 관망하는 상황이다.
건설노조의 행태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지자 이재갑 고용부 장관은 지난달 31일 “채용절차법 개정안이 7월 17일부터 시행되는 만큼, 건설현장에서 발생하는 채용 강요 등의 행위에 대해서도 법에 따라 조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개정 채용절차법에 따르면 위법하게 채용을 청탁하거나 압력을 넣고, 강요할 경우 3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
그러나 건설업계는 “처벌 수위가 너무 낮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건설노조는 ‘불법 외국인 고용 규탄 집회’, ‘타워크레인 안전사고’ 등 다른 구실로 집회를 열어 공사를 방해하는 전략을 쓰기 때문에 정부가 제재를 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건설업계에서는 노사갈등에 적극 개입하지 않고 노동계 눈치만 보는 정부에 대한 불신도 크다. 한 건설업체 관계자는 “고용부는 물론이고 경찰도 노조의 눈치만 보고 불법행위를 관리하지 않는데, 법이 새로 생기면 뭐 하겠느냐”고 말했다. ○ 하도급 구조에 하청업체 큰 피해
건설업계 특유의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갈등 양상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건설현장 한 곳에는 원청 건설사와 함께 골조, 건축, 설비 등 각 분야 공사를 맡는 수십 개의 협력업체가 들어간다. 타워크레인도 대형 건설사가 타워크레인 임대업체와 하도급 계약을 맺으면 근로자는 임대업체와 근로계약을 맺는 구조로 돼 있다.
엄밀히 따지면 원청과 근로자는 아무 관계가 없고, 하청업체와 근로자만 근로계약 관계를 갖는다. 그럼에도 노조는 사실상 공사현장의 전권을 쥔 원청을 찾아가 집회를 벌인다. 이에 원청 건설사들은 “하청업체와 노조의 일이라 우리가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하청업체가 떠맡는다. 서울 지역의 한 아파트공사 하청업체 관계자는 “원청 입장에서도 현장이 시끄러워지면 곤란하니까 상황을 얼른 해결하라고 우리를 압박한다”며 “노조가 집회비용을 주면 집회를 하지 않겠다고 해서 1억여 원을 준 적도 있다”고 말했다. 양대 노총 탓에 일자리에서 밀려나는 비조합원 근로자들 역시 하청업체와 같은 피해자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정부가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노조의 불법행위에 엄정하게 대응해야 하청업체와 비조합원 근로자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행법상 고용부로서도 별다른 수단이 없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범정부 차원에서 종합적인 대응책을 마련하는 한편 노조의 불법행위는 사법당국이 엄정한 법집행을 통해 채용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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