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경북 포항시의 해병대 동원훈련장 대형 강당. 훈련단장 A 씨가 예비군을 상대로 1시간 동안 안보교육을 했다. 대형 스크린에서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정상회담을 하며 손을 맞잡고 웃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A 씨는 이 장면을 보여주면서 “과거엔 북한이 주요한 위협이었지만 이제는 평화와 화해, 협력의 시대가 왔다”고 했다. 그런데 곧이어 A 씨가 틀어준 강의 동영상에는 ‘북한의 위협에 맞서 전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강의를 들은 예비군 B 씨(25)는 “군 생활을 할 때는 주적인 북한을 쳐부숴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교육 내용이 왔다 갔다 해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현역 장병들 사이에서도 ‘정권에 따라 안보교육 내용이 달라지다 보니 혼란스럽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육군 C 일병(25)은 “정신교육을 할 때 예전에는 북한이 주적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사회가 변해 일본과 중국 등 우리나라의 안전을 위협하는 주변국들로 위협 대상이 바뀌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C 씨는 실제 군사훈련을 받을 때는 북한의 침투 상황을 가정해 훈련하는데 정신교육 내용은 그렇지 않아 혼란스러운 점이 있다고 털어놨다.
일부 장병의 볼멘소리가 아니다. 새로 개편된 2019년 국방부의 정신전력교육 기본교재(사진)를 봐도 ‘북한의 도발’과 관련된 내용은 4쪽에 불과하다. 전체 3부로 구성된 이 교재는 1부 국가관이 전체 94쪽, 3부 군인정신은 99쪽 분량이다. 이에 비해 2부 안보관은 65쪽인데 이 중 북한의 도발 관련 분량은 4쪽이다. 한국정치학회가 만든 이 교재 초안에는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 국군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위협적인 적’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검토를 거치는 과정에서 이런 표현이 빠지고 교재 최종안에서는 ‘대한민국의 국가 이익과 가치를 위협하는 세력은 당연히 우리 국군의 적이다. 최근에는 영원한 친구나 영원한 적도 없고 모호한 위협으로 나타나거나 새로운 유형의 위협으로 등장한다’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안보교육을 맡은 간부들은 안보관보다 군인정신에 초점을 맞춰 강의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육군본부가 개발 중인 정신교육 교수법 프로그램도 북한의 도발과 관련된 내용보다는 용기와 리더십 같은 군인정신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고 한다. 지난해까지 정훈장교로 복무한 D 씨는 “상부에서 ‘군인정신 위주로 교육을 하라’고 했다. 안보관은 정권에 따라 방향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바뀔 일이 없는 군인정신 위주로 교육하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군인정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정권에 따라 안보관이 바뀌면 장병들은 혼란스럽고, 안보태세에 허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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