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알록달록한 담뱃갑에 호기심을 보였다. 선풍기를 쐬는 익살스러운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하늘색 담뱃갑을 본 아이는 박하사탕을 떠올리기도 했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지난달 26일 서울 성동구 성수초등학교의 협조를 얻어 5학년 금연교육 시간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담뱃갑에 대한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해외 담뱃갑에는 경고 그림과 문구 말고는 홍보용 문구나 이미지를 일절 넣을 수 없다. 일명 ‘무(無)광고 표준 담뱃갑’이다. 하지만 국내 담뱃갑 표면의 절반은 알록달록한 광고들로 채워져 있다. 이날 설문은 담뱃갑의 이 같은 차이가 담배를 접해보지 않은 청소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으로 유현재 서강대 지식융합미디어학부 교수와 이성규 국가금연지원센터장에게 자문했다. 설문 조사는 성수초교의 금연교육을 담당하는 강류교 보건교사와 함께 진행했다.
초등 5학년을 대상으로 한 것은 이 무렵부터 담배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국내 청소년의 흡연 시작 연령은 중학 1학년(만 13세)이다. 보건복지부가 배포한 초등생 흡연예방 교육용 자료에서 담뱃갑 광고 관련 내용을 다루는 것도 흡연을 아예 시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취재팀은 먼저 학생들에게 경고 그림을 가린 국내 담뱃갑들 사진을 보여준 뒤 첫인상과 느낌을 적게 했다. 그 결과 학생 32명 중 21명(65.6%)이 긍정적으로 답변했다. ‘위험하지 않아 보인다, 안전해 보인다’는 답변이 7명으로 가장 많았다. ‘담배 같지 않다’(5명), ‘아이스크림, 사탕, 껌 같다’(5명)에 이어 ‘재밌다, 신기하다’고 쓴 학생도 4명이었다. 부정적 반응은 ‘담배 같다’고 답한 6명뿐이었다.
이어 영국과 캐나다의 표준 담뱃갑 사진을 역시 경고 그림을 가린 채 보여줬다. 두 나라 담뱃갑 색상은 알록달록한 국내 담뱃갑과 달리 진한 갈색이었다. 빨간색과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적힌 경고문구는 국내 경고문구보다 눈에 잘 띄었다.
학생 32명 중 19명(59.4%)은 해외 담뱃갑이 ‘위험해 보인다’고 답했다. ‘안 좋아 보인다’는 답변까지 합치면 10명 중 7명꼴(65.6%)로 부정적 반응을 보인 것이다. 심지어 ‘총알 같다’, ‘위험한 무기 같다’고 쓴 학생도 있었다. 방주원 양(11)은 “우리나라 담뱃갑은 노란색이라 파인애플 아이스크림이 생각났다”며 “그런데 해외 담뱃갑은 열면 왠지 죽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가로 6.3cm, 세로 5cm, 두께 1cm의 담뱃갑이 담배에 대한 청소년들의 인식을 이렇게 좌우하는 셈이다.
이처럼 국내 담뱃갑을 접한 청소년들은 자연스럽게 담배에 대한 호기심과 긍정적 인식을 갖게 될 확률이 높다. 2016년 담뱃갑 경고 그림이 의무화되면서 국내 담뱃갑 표면의 광고는 절반 크기로 줄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담배 회사의 광고판으로 남아 있다. 실제 청소년의 흥미를 끌 만한 웹툰, 동물 캐릭터, 만화를 넣은 담뱃갑도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에도 표준 담뱃갑이 도입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담배광고를 할 수 없다 보니 담배회사들은 담뱃갑 광고에 특히 공을 들이고 있다. 이들 회사는 성인 흡연자를 겨냥한 광고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담뱃갑 자체가 광고인 데다 담배를 들고 다니는 흡연자가 ‘걸어 다니는 담배 광고판’이 되다 보니 비흡연자는 물론 청소년까지 담뱃갑 광고에 무분별하게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복지부는 국민건강증진법을 개정해 2022년 12월부터 국내에 표준 담뱃갑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호주나 영국 프랑스 등 8개국이 도입한 표준 담뱃갑에는 담배회사 로고는 물론 제품을 대표하는 색상 이미지 문구 등이 금지된다. 정부가 정한 글씨체로 제품명만 쓸 수 있다. 복지부 계획대로 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광고가 절반인 담뱃갑은 2023년이면 사라지게 된다.
정영기 복지부 건강증진과장은 “표준 담뱃갑은 담배를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담뱃갑 광고를 원천 차단하고 기존 경고 그림의 효과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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