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대한적십자사에 익명의 민원이 접수됐다. 제주도혈액원(제주혈액원) 일부 직원이 다단계에 빠져 다른 직원들에게 수십만 원짜리 물품 구입을 권유한다는 것이었다. 직장 상관의 사실상의 강매에 신고자는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 봐 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런 행위는 봉사활동을 하는 학생이나 헌혈자가 있는 근무 공간에서도 버젓이 벌어졌다.
적십자사 감사 결과 다단계에 빠진 직원은 일부가 아니었다. 제주혈액원 전체 직원 36명 중 13명이 본인 또는 배우자가 다단계 회원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 중 2명은 배우자 명의로 가입했지만 영업은 주로 본인이 관여했다. 이는 최도자 바른미래당 의원이 적십자사에서 제출받은 감사 현황 자료에 담긴 내용이다.
다단계는 하위판매원을 많이 둘수록 돈을 버는 구조다. 본인과 하위판매원의 영업실적에 따라 후원수당을 받는다. 한 직원은 2017년 1380만 원어치 물품을 구매했고 후원수당으로 약 170만 원을 받았다. 2006년부터 다단계를 해온 다른 직원은 하위판매원이 50명이나 됐다. 이들은 제주혈액원에 20년 가까이 근무한 고참이어서 후배들은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일부 직원은 억울하다고 했다.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다는 말에 회원으로만 가입했을 뿐 하위판매원을 모집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적발된 직원 중 상당수는 감사에서 “구매 실적에 따라 후원수당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직원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업무에 종사하지 못한다’는 적십자사의 직원 운영 규정을 어긴 것이다.
적십자사는 제주혈액원을 기관경고 조치하고 가장 적극적으로 직원들에게 물품 구입을 권유한 A 씨에게만 경고 처분을 내렸다. 나머지 다단계 직원들은 징계를 받지 않았다. 영리행위가 지속적으로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고 내부 직원들에게 물품 구입을 권유했는지 입증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적십자사의 감사가 제대로 이뤄졌는지는 의문이다. 다단계 업체로부터 구체적인 정보를 받지 못해 감사는 주로 직원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신고자는 고발 민원에서 “(상급자) 눈치가 보여 직원들은 (강매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본업보다 잿밥에 더 신경 쓴 혈액원 직원들의 행위가 혈액 관리에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혈액원은 국민 건강과 직결되는 곳이다. 혈액이 오염되거나, 부적절한 혈액이 수급되지 않도록 혈액 관리에 한시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 이런 곳에 다단계 판매원이 수년간 드나들고 직원들 사이에 다단계 영업이 이뤄졌다는 사실은 적십자사의 혈액사업에 대한 불신을 키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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