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 남도답사 일번지/유홍준 지음/454쪽·1만6500원·창비
1990년대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교차했고 집단에서 개인으로 가치가 이동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이 시대의 시작점은 1990년이 아니라 1993년이지 않을까. 32년 동안 이어진 군사정권에 마침표를 찍고 문민정부가 출범한 해가 1993년이니 말이다. 문민정부는 국가부도라는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지만 그 시작은 원대했다. 새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다”라고 연설했을 때 현장에서, 혹은 텔레비전 앞에서 가슴이 뛰지 않은 국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1993년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이 출간된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알게 된 건 대학에 입학한 1995년이었다. 지금이야 고등학교에서 작가를 초대해 강연회를 열기도 하지만 그때는 고등학생이 교과서나 동서양 고전 이외의 책, 그러니까 동시대에 주목받는 책을 읽는 것이 그리 보편적이지 않았고 때로는 ‘공부하기 싫어 딴짓한다’며 야단을 맞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동시대 책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도 없었다. 인터넷이 보급된 건 1998년 무렵이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1권(남도답사 1번지)뿐 아니라 2권(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1994년)과 3권(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1997년) 모두 베스트셀러가 됐다. 물론 그때는 그 인기가 2019년까지 이어지리란 걸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아시다시피 이 시리즈는 7권까지 출간됐고, 그 뒤 북한 일본 서울 중국편 시리즈로 이어졌으며, 거의 모든 시리즈가 현재에도 스테디셀러 반열에 올라 있다.
이 책의 인기 요인이라면 일단 풍부한 정보를 들 수 있다. 그 정보는 저자의 지식뿐 아니라 애정까지도 포함한다. 저자는 지식과 사료를 근거로 문화유산과 유적지를 설명하면서도 자신의 감수성과 경험, 주변 사람들과의 일화를 풀어놓음으로써 더 특별한 답사기를 창출해냈다.
수학여행 때나 겉핥기로 들렀던 유적지와 사찰이 저자의 문장을 통과하면 그야말로 열려 있는 박물관이 됐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명한 구절처럼 저자는 독자들이 박제된 지식을 얻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문화유산과 그 문화유산이 있는 지역에서 특별한 추억을 쌓아 향유하길 바랐을 것이다. 이 장대한 답사의 1장 1절이 그때껏 유적지로나 관광지로서 단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 없는 강진과 해남이었다는 것도 저자의 의도를 가늠케 한다.
여행에 관심이 높아진 것도 또 다른 인기 요인이었다. 19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유럽을 중심으로 한 패키지여행과 배낭여행이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한쪽에선 해외여행 경비에 부담을 느끼거나 국내여행이라도 제대로 하자고 생각했는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그런 사람들에게 뜻깊은 길라잡이가 되어줬다.
대학 시절, 나 역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권을 들고 친구와 정선에 간 적이 있다. 아우라지강에서 처녀상을 봤고 여랑에 위치한 옥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책에 나온 여정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저자가 옥산장에서 묵을 땐 주인아주머니가 노래를 불러줬다고 나와 있었지만, 그 밤엔 노랫소리가 들려오지는 않았다. 대신 희미한 물소리 사이로 앞선 시대를 살다가 떠나간 사람들의 설화(說話)가 들려오는 듯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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