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 호황때도 “우리는 위기” 성찰… 세계1위 도약 디딤돌 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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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5> ‘위기의식’으로 기회 만든 삼성

“국가로 보나 삼성그룹으로 보나 보통의 위기가 아닙니다. 정신 안 차리면 구한말과 같은 비참한 사태가 올 수도 있습니다.”

1993년 8월 4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6월 ‘신경영 선언’ 두 달 뒤 동아일보 기자와 만났다. 신경영 선언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며 강도 높은 품질경영 방침을 대내외에 알린 사건이었다. 기자가 “품질경영은 경영의 기본인데 왜 지금 강조하는지”라고 물었다.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나은 곳이 삼성인데 삼성은 분명히 이류입니다. 3만 명이 만든 물건을 6000명이 하루에 2만 번씩 고치고 다니는 이런 비효율 낭비적 집단은 지구상에 없어요. 이걸 못 고친다면 구멍가게도 안 돼요.”

이 회장은 저서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1997년)에서 신경영 선언 전 극심한 위기감을 느꼈다고 썼다. 위기감이 신경영 선언의 배경이었던 셈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불고기를 3인분은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대식가인 내가 식욕이 떨어져서 하루 한 끼를 간신히 먹을 정도였다. 그해(1992년)에 체중이 10kg 이상 줄었다.”

○ 퀀텀 점프 기반 된 ‘위기의식’

하지만 임직원들은 이 회장의 위기의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른바 ‘3저 호황’ 직후 한국 경제도, 삼성도 상승세였다. 1993년 한국 수출액은 전년 대비 49.0% 늘었고, 삼성전자 매출(개별 기준)도 33.6% 늘었다. 이어지는 반도체 호황으로 1994, 1995년 삼성전자 매출은 연속해서 40% 이상 증가율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이 회장 눈에는 해외 대리점에서 먼지 쌓인 채 굴러다니는 TV, 11.8%에 달하는 휴대전화 불량률이 보였다. 근본적인 품질 경쟁력이 일본이나 미국 수준이 되지 않으면 언젠가 호황이 끝날 때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절박감이 컸다.

반도체 실적에 취한 조직이 변하질 않자 이 회장은 ‘애니콜 화형식’으로 불리는 드라마틱한 조치를 취했다.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 ‘100% 양품만 만들겠습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렸고 직원들은 ‘품질은 자존심’이라고 쓴 띠를 둘렀다. 운동장에는 휴대전화, 무선전화기, 팩스 불량품 15만 대, 약 500억 원어치의 제품이 쌓여 있었다. 직원들이 망치로 부수고 기름을 뿌려 불태웠다. 이를 지켜보던 임직원 2000여 명 중에는 흐느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조직 구석구석까지 위기의식이 퍼지게 된 순간이었다. 직원들 눈빛까지 달라진 삼성은 17년 후인 2012년 마침내 세계 휴대전화 시장 1위를 차지했다.

삼성 특유의 위기의식은 1997년 말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는 바탕이 됐다. 당시 삼성전자도 자본잠식 위기에 이르는 등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았고, 1998년 7월 삼성전자 최고경영진 20여 명은 10시간이 넘는 마라톤회의 끝에 강도 높은 구조조정안을 발표했다. 동시에 윤종용 당시 사장을 포함한 참석 임원 모두 사표를 썼다. 구조조정에 실패하면 모두 사임하겠다는 결의의 표현이었다. 이듬해 말, 윤 사장은 사임 대신 미국 주간지 비즈니스위크 표지를 장식했다. 삼성이 어떻게 1년 만에 위기 탈출에 성공하고 더욱 강해졌는지 분석하는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다. 1999년 삼성전자의 당기순이익(개별 기준)은 전년 대비 10배 뛰었다.

○ 결단을 내릴 땐 과감하게


삼성전자가 2006년 소니를 이기고 마침내 TV 시장 세계 1위에 올랐을 때에도 이 회장은 축포를 터뜨리지 않았다. 당시 삼성 경영진이 일본 언론과 1위를 자부하는 인터뷰를 하자 대로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 정통한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은 일본으로부터 아직 배울 게 많은데 자극하면 안 된다며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일본 정재계에서 ‘삼성 때리기’ 조짐이 보였다. 삼성 측이 일본 오피니언 리더들을 대상으로 “한일이 힘을 합쳐 부상하고 있는 중국 시장에 뛰어들어야 한다. 서로 반목할 때가 아니다”라며 설득해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삼성 리더십의 위기의식은 세계 경제 흐름에 대한 집요한 관심에서 출발했다. 때로는 기회를 발견해 과감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1986년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은 반도체 불황 중에 용인 기흥 3라인을 건설하라며 “돈 걱정 말고 서둘러야 한다. ‘미국의 보복’이 생각보다 빨라질 것이다”라고 지시했다. 이 창업회장은 일본의 공세에 미국 D램 업체들이 도산하면서 ‘제2의 진주만 공습’이란 말이 나오는 데다 일본 기업이 당시 소련 잠수함에 컴퓨터 프로그램을 판매한 사건을 신문에서 보고, 미일 무역 마찰을 예상한 것이다. 그 예상은 맞아떨어져 삼성은 3라인 건설을 바탕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이건희 회장이 1987년 4Mb D램 개발 당시 반도체 설계 공법을 결정한 일도 유명하다. 웨이퍼에 쌓느냐(스택형), 웨이퍼를 파느냐(트렌치형)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삼성은 당시 주류가 아닌 스택형을 택하는 모험을 했다. 이 결정은 1992년 삼성이 세계 D램 시장 1위에 오르는 디딤돌이 됐다.


▼ 한발 앞선 리더십의 원천은 ‘끊임없는 공부’ ▼

이병철, 美-日 경제전문가 조언 듣고 1년 넘게 연구한 뒤 반도체 진출
이건희 ‘일본 프렌즈’ 등 인맥 탄탄… 글로벌 경제 흐름에도 항상 촉각


삼성 특유의 위기의식과 과감한 의사결정의 바탕은 최고위 경영층이 미국 일본 기술 ‘고문’으로부터 듣고, 공부했기 때문이라는 게 삼성 안팎의 중론이다.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은 1983년 삼성이 반도체에 뛰어든다는 ‘도쿄 선언’ 전 1년 이상 반도체 관련 자료를 모아 연구했다. 반도체 선언에 결정적 요인이 된 것도 일본과 미국 경제 전문가의 조언이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이건희의 일본 프렌즈(LJK)’와 같은 글로벌 정재계 인맥을 쌓는 동시에 기술 디자인 품질 전문가를 삼성 고문으로 중용했다. 1993년 신경영 선언의 도화선이 된 ‘후쿠다 보고서’가 대표적이다. 당시 일본의 디자인 전문가 후쿠다 다미오 씨는 삼성 고문으로서 삼성의 문제를 조목조목 정리해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회장은 ‘삼성전자 40년사’에서 1987년 반도체 설계 공법을 결정했을 당시 “사실 나도 100% 확신할 수 없었기에 운이 좋았다 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삼성 안팎의 젊은 엔지니어들의 주장을 신뢰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 회장은 글로벌 경제 흐름에도 관심이 높았다. 2003년 신년사에서 “한국이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의 늪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른바 중진국 트랩에 빠지지 말고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같은 결론을 내기 위해 약 1년 동안 비서진에 주요국 1인당 국민소득 자료를 꾸준히 요구했다고 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 3만 달러로 가는 데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 연구한 것이다

삼성에 정통한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은 늘 ‘나는 임원들보다 시간이 있고, 많은 전문가를 안다’고 말했다. 미래의 위기와 기회를 엿보고, 의사결정하기 위해 끊임없이 배운 것”이라고 회상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시간이 날 때마다 글로벌 정재계 및 과학계 전문가를 만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편이다. 올해에만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등을 만났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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