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100년을 준비합니다/2020 新목민심서-공직사회 뿌리부터 바꾸자]
<5> 적극행정 거리 먼 지방공무원들
“전례가 없어요. 전례가.”
충북 청주시의 한 마을 주민들은 지난해 6월부터 주민센터와 구청, 시청에 중증 치매를 앓는 A 씨(90) 부부를 도와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부부는 부동산과 현금 자산이 5억 원이 넘어 ‘알부자 농사꾼’으로 불렸다. 하지만 부부가 둘 다 치매에 걸린 뒤부터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다. 올해 초엔 오물 범벅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이웃에게 발견됐다. 요양시설에서 여생을 보낼 재산은 있지만 재산 처분이나 시설 입소를 결정할 자녀 등 보호자가 없는 게 문제다.
이런 상황에도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은 “우리가 도울 의무가 있는지 검토해 봐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지자체는 성년후견제를 활용하면 자산이 있는 치매 노인에게도 후견인을 붙여 줄 수 있다. 그럼에도 지자체에선 “극빈층도 아닌데 우리가 나서서 돕게 되면 나중에 괜한 오해를 받을 수 있다”며 손을 놓고 있다.
지자체 산하 치매안심센터 관계자 역시 “지금까지 센터가 자산이 있는 노인을 도운 전례가 없다”며 “마음대로 후견 신청을 했다가 나중에 (상급기관 등이) 문제 삼으면 기자가 책임질 것이냐”고 반문했다. ○ “전례 없다” 복지부동… ‘동네규제’만 양산
공직사회에서 지자체 일선 공무원은 ‘가두(街頭·street-level) 관료’라고 불린다. 행정 최일선에서 정부 정책을 집행하고 직접 공공서비스를 전달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인허가 권한의 상당수가 지자체로 위임돼 있다. 복지·행정 서비스가 실제로 굴러 가려면 지자체 공무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민 서비스의 최전선에서 각종 고충을 겪는 측면도 있지만 이들을 향한 국민의 시각이 곱지만은 않다. 각종 핑계로 안 되는 이유부터 찾는 모습 때문이다. 실제로 지역 공직사회에는 주민 민원, 전례, 사후 감사 등을 핑계 삼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복지부동(伏地不動) 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B 씨(60)는 2017년 5월 부산 북구에서 의원을 개설하기 위해 건물주와 계약을 맺은 뒤 내부 리모델링, 간호사 채용 등 개원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구청은 그가 제출한 의료기관 개설 신고를 수리하지 않았다. 의료법에 따르면 의원(30병상 미만)을 개설하려면 근무 의료인 수 등 법적 요건을 갖춰 관할 지자체장에게 신고만 하면 된다. 하지만 구청은 의원 개설을 반대했다. 해당 건물에 학원이 많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이 들어서는 걸 반대하는 민원이 많았다는 이유에서다. B 씨는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최종심까지 모두 B 씨 손을 들어줬지만 구청은 여전히 설립 허가를 미루고 있다.
반대 민원을 알아서 해결해 오라고 떠밀기도 한다. 대구에 반려동물 화장장을 지으려던 C 씨는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화장장을 지으려면 구청 앞에 붙은 반대 플래카드를 모두 떼어 오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는 2016년 화장장 터를 매입한 뒤 구청에 지상 2층 규모의 동물 화장장을 지을 수 있는지 질의했다. 당시 담당 공무원은 유권해석 결과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반대하는 주민이 생기자 “환경에 문제는 없느냐” “도로 폭은 충분히 확보했느냐”는 질문을 쏟아냈다. 대법원이 건축허가신청 반려처분 취소소송에서 C 씨 손을 들어줬음에도 담당 공무원은 요지부동이었다.
‘특정업체 편의를 봐줬다’는 얘기를 들을까 봐 법보다 무서운 ‘동네규제’를 양산하기도 한다. 지방의 한 2년 차 공무원은 민원인 질의가 들어오면 법이나 조례에서 “허용하면 안 된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부터 찾는다고 털어놨다. 특정 민원인의 편의를 봐줬다는 의심을 사기 싫어서다. 이런 이유로 지자체에서 다룰 수 있는 문제를 상급기관으로 떠넘기는 경우가 많다. 지난 정부의 범부처 규제개혁회의에서 해결한 안건의 80%는 지자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규제였다. ○ 민원인 직접 상대, 소송·징계 위험 노출
지방공무원들도 할 말은 있다. 강원 지역의 한 주무관은 “자칫 잘못 대응하면 민원인한테 소송을 당할 수 있어 적극적으로 일을 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2018년 공무원이 피의자인 범죄 접수 건수는 3만6872건으로 이 중 소송 대상이 되지 않거나 요건을 갖추지 못해 각하된 건은 1만6281건으로 전체의 절반에 가깝다. 공무원에 대한 고소 고발이 남발되고 있다는 뜻이다. 지방공무원은 특히 민원인을 직접 상대하기 때문에 고소 고발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적극적으로 일하다가 징계를 받을 때도 많다. 공무원 D 씨는 태풍 피해를 빠르게 복구하기 위해, 차량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선박의 접안시설 마련 사업에 예산 1억6900만 원을 사용했다. 태풍 때문에 접안시설이 유실돼 섬 주민 51명의 발이 묶여 있는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사업이 기존에 예산이 편성되지 않은 사업이었다는 점이다. D 씨는 절차 위반으로 경징계를 당했다. 적극행정을 해도 돌아온 것은 징계 처분이었던 셈이다. 이후 사정을 알게 된 행정안전부는 D 씨를 면책했다.
지방공무원을 감시할 세력이 없는 것도 큰 문제다. 지방의회는 견제 능력이 떨어진다. 지방의회 의원들은 인허가를 받아야 하는 건설업, 자영업 등을 겸직하는 경우가 많아 적극적으로 행정 권력을 감시하기 어렵다. 중앙정부와 달리 감사원의 감사도 상대적으로 소홀하다. 가급적 일을 벌이지 않는 게 공무원들에게 유리한 현실이다.
공무원의 가장 큰 보상인 인사가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는 점도 문제다. 지방공무원들은 “우리는 성과인사가 아닌 ‘안면인사’를 한다”고들 한다. 한 지역에서 계속 근무하기 때문에 연공서열이나 인사권자와의 친소 관계에 따른 인사를 한다는 것이다. 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지방공무원 개인 탓으로만 돌릴 순 없다.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일을 할 만한 성취동기를 키워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