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자치구 소속 사회복지사 A 씨는 지난해 혼자 사는 80대 치매 노인 B 씨를 돌봐줄 ‘공공 후견인’을 지정해 달라고 구 담당 공무원에게 요청했다. B 씨는 스스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뿐더러 밥상을 차릴 수도 없어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지만 돈 쓰는 방법조차 잊어 1년 가까이 월세도 밀린 상태였다. 공공후견인 제도는 B 씨 같은 홀몸 치매 노인을 돕기 위해 지난해 도입됐다.
하지만 해당 공무원은 복지사의 요청을 외면했다. 이 공무원은 “가정법원에 후견심판을 청구하려면 필요한 서류가 많다. 올해는 이미 (후견인 지정) 실적이 한 건 있으니 내년에 건수를 늘려야 할 때 청구하자”고 했다. 지방자치단체가 법원에 후견심판을 청구하려면 치매 노인의 재산, 건강, 실질적 가족관계 등을 입증하는 여러 보고서를 내야 한다. 구청 공무원의 말은 이미 그해 목표 실적을 채웠기 때문에 귀찮은 일을 더 만들지 말자는 뜻이다.
본보 기자에게 사정을 전해 들은 보건복지부 치매정책과 담당자는 “지자체마다 한 건만 청구하라는 게 아니라 제도 도입 초기인 만큼 최소 ‘한 건 이상’ 발굴하라고 독려한 건데…”라며 당혹스러워했다.
▼ 수치 위주 평가가 공무원 경쟁력 갉아먹어 ▼
숫자 채우기 급급
B 씨 사례는 본인에게 할당된 명목상의 실적만 신경 쓰게 하는 공무원 성과 지표와 평가 시스템의 전형이다. 정부에서 이뤄지는 성과 평가가 대부분 숫자 채우기로 이뤄지고 있는 게 이 같은 현상을 유도하는 이유 중 하나다. 새 제도를 도입한 뒤 ‘○○건’의 실적을 올렸다고 홍보하거나 이미 정해진 정책을 그럴듯하게 재포장해 정부 대책의 가짓수를 늘리는 식이다. 숫자를 채우는 데 급급하다 보면 정부 정책이나 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뜻있는 공무원을 좌절하게 하는 요인이다.
고무줄 잣대로 실제보다 성과를 부풀리거나 처음부터 목표치를 낮게 잡아 성과가 높게 보이도록 하는 관행도 만연해 있다. 이창길 세종대 행정학과 교수는 “실제로 나타나는 정책 효과가 더 중요한데 계량적 수치 중심으로 성과를 평가하다 보니 숫자 채우기에만 급급해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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