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10월 미국의 한 소장 물리학자가 프랑스에서 펴낸 한권의 책이 프랑스 지성계를 강타하고 있다. 뉴욕대교수인 앨런 소칼(43)의 ‘지적 사기’.
소칼은 이 책에서 “장 보드리야르, 질 들뢰즈, 자크 라캉, 줄리아 크리스테바, 자크 데리다 등 내로라하는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하찮은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 의미도 모르는 부정확한 과학용어를 남발, 독자들을 기만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계몽주의의 합리적 전통을 거부하고 물리학 수학등의 과학개념을 멋대로 남용하면서 모호한 주장을 펼쳐 세계 지성계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소칼은 보드리야르의 ‘복합 굴절의 초공간’ ‘법칙의 가역화’, 라캉의 ‘위상 기하학’, 크리스테바의 ‘집합이론’등을 그 예로 들었다.
프랑스 지성계가 가만히 있을리 만무하다. ‘르몽드’ ‘리베라시옹’ 등 유력 일간지들의 대대적인 보도에 이어 11월에 들어선 데리다 크리스테바 등 당사자들이 본격적인 반격의 포문을 열었다. 이들은 “과학용어가 잘못됐다면 그것은 과학자들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단선적 물질적 진실보다는 상식을 벗어난 가설이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해준다”고 논박하고 있다.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과학개념은 하나의 메타포(은유)인데도 소칼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 논쟁은 양국 지성계의 자존심 대결로 비화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과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다. 과학은 진정 불변의 객관성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과학절대주의), 아니면 역사와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바라볼 것인지(과학상대주의, 포스트모던과학)의 대결.
소칼은 물론 철저한 과학절대주의자이다. 그는 96년 봄 미국에서 ‘지적 사기’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경계의 넘나들기―양자력의 변형적 현상학을 위하여’를 발표한 바 있다.
글의 내용은 놀랍게도 과학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던과학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발표 직후 미국 유럽 등 전세계는 그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절대주의에 관한 관심을 끌기 위해 소칼이 일부러 조작한 글임이 밝혀졌다. 더 큰 충격을 몰고온 것이다.
소칼의 ‘지적 사기’ 역시 인문과학이 감히 자연과학을 말할 수 있는 것인지, 과학적 사실을 사회 정치 역사 문화 등과 연관지어 논할 수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한 비판이다.
과학은 결코 사회역사적 산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과학 자체의 논리로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과학의 합리성 객관성 보편성에 대한 옹호이다.
‘지적 사기’논란은 이제 미국 프랑스 양국에서 각각 친(親)소칼과 반(反)소칼 진영으로 나뉘어 새로운 대결구도로 들어서고 있다. 과학의 절대성에 의문을 표시하는 반소칼주의자(과학상대주의자 포스트모던과학자)들은 과학의 엄격성이나 단선적인 객관성을 잣대 삼아 인문학을 바라보려는 과학주의자들의 시각이야말로 또다른 권위주의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결국 소칼의 ‘지적 사기’논쟁은 과학의 객관성을 둘러싼 ‘과학전쟁’의 한 양상이다.
아직도 과학 자체를 절대 신뢰하는 분위기가 강한 우리의 경우 아직 이에 관한 논쟁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아니지만 과학사 과학철학 과학사회학 등 과학학 전문가를 중심으로 그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국민대 김환석교수(과학사회학)는 “소칼논쟁을 흥미차원으로 이해해선 안된다”고 전제하고 “우선 취약한 과학사나 과학철학 등의 기초를 다지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조언한다.
〈이광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