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업준비에 바쁜 대학졸업반 승호. 어느날 PC통신으로 전자우편을 받는다. 발신인의 ID는 ‘LivE’. ‘네가 원하는 것을 주마. 집앞 편의점 쓰레기통 옆을 봐라.’ 다음날 승호는 LivE가 알려준 장소에서 1등으로 당첨된 복권을 발견한다.
▼ PC통신 하이텔의 인기 괴담작가 유일한씨의 괴담집 ‘어느날 갑자기’중 ‘E메일’편. 취업불안에 시달리는 승호는 악마(LivE를 뒤로 읽은 EviL)의 편지를 한 장씩 받을 때마다 조금씩 변해간다.낯선 이로부터의 편지. 사이버세대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 아닌가. 인터넷과 PC통신을 통해 쇄도하는 광고문과 사기성 편지들. 승호의 경우는 단지 상대가 악마일 뿐.
▼ LivE의 두 번째 편지. ‘오늘 밤 10시 동네 버스정류장에서 회색양복을 입은 사람이 주는 것을 받아라.’ 그 곳에서 승호는 자신을 술집 종업원으로 착각한 회색양복의 취객이 막무가네로 건네는 지갑을 받아든다. 현금 6백만원을 챙기고 현금인출기에서 카드로 수 백만원을 찾는다.
▼ 요즘 PC통신에 올라와 있는 공포물의 대표적인 두 갈래는 ‘괴담’(怪談)과 ‘공포환타지’.괴담은 ‘컴퓨터실에서 죽은 아이’ ‘교내방송에서 들리는 죽은 친구의 목소리’식의 이야기들. 중고생들이 주 원작자로 추정되며 학교나 사회생활의 불만에 현실의 부조리가 양념으로 가미된다.‘공포환타지’는 94년 하이텔 ‘summer’란에 연재됐던 이우혁씨의 ‘퇴마록’이 기원. 철저한 사전취재를 바탕으로 황당무계한 가설에 현실감을 불어넣으며 수 개월씩 시리즈로 연재되기도 한다. 최근 하이텔에 ‘사자의 나라’를 연재했던 작가 이종호씨는 “전통장례절차 무속 초능력 무속인저술 등 20여권의 관련서적을 탐독했다. 흉가의 분위기를 충실히 전하기 위해 경북 산골의 버려진 한옥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고 설명.
▼ ‘동네 지하철역 물품보관함에 세번째 선물이 들어있다’는 세번째 메시지. 승호가 발견한 것은? 같은 과 동료지만 외제차를 몰고 다니며 여대생 농락을 일삼는, 평소 ‘죽이고 싶도록’ 밉던 철진의 머리.
▼ 덕성여대 심리학과 김미리혜교수. “사람은 어느 정도의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자극이 없거나 지속적으로 같은 수준의 자극만 있는 생활은 정서를 불안하게 한다. ‘괴기담’은 이런 생활에 청량제역할을 할 수 있다.”
▼ 저녁 뉴스를 본 승호.충격에 몸을 떤다. ‘한 남자가 폭행을 당해 숨진 채 발견됐으며 지갑은 범인이 갖고 달아났다. 토막살인을 당한 20대 남자의 머리가 지하철역 물품보관함에서 발견됐다. 경찰은 지하철역과 은행 CCTV에 찍힌 모습으로 봐 동일범의 소행인 것으로 보고….’
▼ 당신은 자기도 모르게 ‘악마’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가 IMF를 원했던가.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불러들인 IMF라는 흉물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진저리치고 있다. 당신 하나 하나의 허세와 나태함이 수 십만명의 ‘목’을 자르고 있건만 당신은 그것을 악마의 짓으로만 치부한다.
▼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또 한 사람과의 만남. 아파트 놀이터로 가라는 악마의 편지를 받은 승호는 같은 악마로부터 자기를 죽이라는 메세지를 받은 앞 동 아파트 경비원과 목숨을 건 혈투 끝에 승리. 그러나 잠시 후 경찰이 들이닥치자 창문으로 몸을 던지는 승호…. 이 때 악마는 ‘Lived’라는 새 ID로 누군가에게 또 편지를 보내고 있다.
▼ Lived를 뒤로 읽어보라. 그러나 등 뒤를 돌아보지 말라….
〈나성엽기자〉news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