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보면 플레밍은 페니실린 사용의 가능성만을 제시했을 뿐이고 이를 실용화 시킨 사람은 옥스퍼드대의 플로리와 체인 박사였다.
옥스퍼드 연구팀이 1940년 페니실린 실용화 논문을 발표한 뒤 플레밍은 이들에게 연구실을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자 이들은 “플레밍이라고? 맙소사. 이미 죽은 줄 알았는데”라고 놀라워했다는 일화가 있다.
옥스퍼드팀은 언론에 대해 생리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페니실린 실용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기자들을 피해 연구소 뒷문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그러자 플레밍 박사가 근무했던 앨름로스 연구소측이 언론사에 편지를 보내 페니실린의 최초 발견자는 플레밍이었음을 제보한다.
그 뒤부터 플레밍은 언론의 표적이 됐다. 그는 사진기자를 위해 자신의 실험실에서 포즈를 취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플레밍으로서는 사실 나름대로 ‘언론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근무했던 세인트 매리 병원은 후원자의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자선병원이었다. 병원이 유명해질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 병원의 후원자였던 베어러브룩경은 당시 영국의 데일리 익스프레스라는 일간신문 소유주였다. 어찌됐든 그의 적극적인 언론관은 후일 그의 ‘영웅신화’를 구축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플로리와 체인 박사는 후일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은 플레밍이 아닌데…”라며 억울해했다고 한다.
〈런던〓윤영찬기자〉yyc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