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처럼 20세기의 모든 갈등 요소들이 3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한 곳에서 뒤엉킨 현장은 없다. 이 때문에 베트남 전쟁의 시종에 ‘우연’이란 요소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다만 정치가들이 만들어낸 ‘인위적 우연’이 있었고 이는 곧 ‘그들의 패배’로 이어지는 요인이 됐다.
64년 8월4일 오전 9시.
백악관에서 민주당 지도자들과 조찬중이던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맥나마라 국방장관으로부터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를 받았다. 베트남측 어뢰정이 통킹만 공해상에 있는 매독스호와 터너 조이호에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 이후 매독스호→사이공 본부→국방부→백악관으로 시시각각 보고가 이어졌다.
△4일 오전9시43분:베트남 어뢰정 공격개시 △오전9시50분:미국 즉각 응사 △오후1시:존슨대통령 러스크국무장관 맥나마라국방장관 등 점심식사하며 회의 △5일0시: 존슨 대통령 대대적인 보복지시 △오전 5시:북폭개시
존슨 대통령은 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의회에 전쟁정책의 법적 뒷받침을 요청했다. 상하 양원은 전쟁권 부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 대통령이 의회의 간섭없이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백지수표를 넘겨받은 것이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고 전선이 남베트남에서 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된 ‘통킹만 사건’은 이렇게 시작이 됐다.
당시 미국인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진영 국가의 국민은 통킹만 사건과 베트남전의 확전은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의 도발 때문이라는 존슨 대통령의 말을 믿었다.
그로부터 7년뒤. 71년6월13일. 뉴욕타임스는 펜타곤(국방부)의 비밀문서를 입수해 특종 보도했다. 정부가 국민에게 해왔던 거짓말이 일거에 폭로됐다.
비밀문서의 핵심은 미국정부가 통킹만 사건을 고의적으로 유도했다는 것.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통킹만 사건 6개월전인 2월1일 ‘34 알파작전’이라는 극비작전을 짜고 실행에 들어갔다. 북베트남 상공에 정찰기 파견, 정보수집을 위한 북베트남요인 납치와 유인, 소형 고속정에 의한 북베트남 연안시설 포격 등이 주요 내용. 엄연한 휴전협정 위반사항들이었다.
미국은 또 베트남측이 선포한 영해 12해리(미국은 3해리만 인정)를 무시하고 영해상으로 구축함을 파견했다. 북베트남 어뢰정은 자신의 영해로 들어온 구축함을 향해 미국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는 반전무드에 불을 질렀고 전장과 후방 모두에서 미정부는 코너에 몰렸다. 결국 닉슨 대통령은 미 지상군을 철수시키고 73년1월 파리 정전협정을 조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그때는 1500억달러의 전비를 날렸고 5만8000명의 병사가 사망(300만명 참전)한 뒤였다.
원래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과 프랑스의 전쟁으로 전형적인 식민지와 제국주의 국가간의 전쟁이었다. 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후 일본군이 베트남에서 물러가자 프랑스는 자신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다시 차지하려고 군대를 보냈고 8년간의 전쟁이 시작됐다(제1차 베트남전쟁).
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제네바 회담에서 2년이내 통일선거를 약속하고 17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 정부가 남쪽은 프랑스가 지원하는 바오다이 왕정이 통치하게 됐다.
통일선거의 약속은 깨지고 남북 베트남은 사실상 내전상태로 들어가게 됐다. 이때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중국의 공산화(49년)와 한국전쟁(50년)에 자극을 받아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인도차이나 반도가, 곧 이어 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된다’는 도미노 이론을 들고나와 프랑스를 밀어제치고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제2차 베트남 전쟁).
전쟁의 성격이 ‘식민지와 제국주의 국가의 전쟁’에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국가의 전쟁’으로 변하게 된 것. 그러나 이는 서방측 시각일 뿐이었다. 베트남의 입장에선 프랑스든 미국이든 똑같이 자신들의 독립을 막는 제국주의 국가로 비쳐졌다.
통킹만 사건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95년 회고록에서 “도미노 이론의 환상에 빠져 베트남의 민족주의를 무시한게 전쟁개입과 패배로 이어졌다”며 “미국은 고딘 디엠 베트남 대통령의 암살이후 바로 철수했어야 했다”고 한탄했다.
〈이병기기자〉watch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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