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낮 없이 일하는 자신을 기다리던 아내가 알코올중독이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는 요즘 참선수행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갑자기 사는 게 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들을 내팽개치고 인생을 경주하듯 달려왔다”는 그는 “마음공부를 통해 내 안의 평화를 찾으려고 노력중”이라고 말한다.
▼ 김용옥 노자강의 인기폭발 ▼
외국인회사에 다니는 유모씨(36). 남편의 실직 이후 잦은 부부싸움 끝에 이혼위기까지 겪었다. 그녀는 요즘 대학동창들이 만든 고전읽기 소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별 어려움 없이 살다 갑자기 정체성의 혼란에 빠졌다. 너무 여유 없이 살았다는 생각으로 힘들어하던 차에 비움을 강조하는 노장사상에 매료됐다.” 유씨는 김용옥씨 TV동양학 강의를 빠짐없이 시청한 열성팬이다.
급류를 타고 있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문화적 역류현상이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물질적 풍요나 감각적 즐거움만으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복고풍을 통해 정신적 상실감을 메우려는 시도인 셈.
김용옥씨의 TV 동양학 인기는 이의 대표적인 현상. 지난해 11월22일 시작해 이달 24일 종영하는 김씨의 노자강의는 교육방송 시청률사상 최고인 서울 수도권 7%대, 전국 3%대를 웃돌았다. 막바지에는 방청신청이 폭주해 선착순으로 제한했을 정도. 남녀노소 직업불문한 다양한 사람들이 방청객으로 자리를 메웠다. 15일, 아리랑TV 지하4층 스튜디오 마지막 녹화장에서는 그동안 3분의2 넘게 출석한 열성 방청객 150명에게 졸업장이 수여되기도 했다.
김유열 PD는 “김용옥씨 개인에게 관심을 갖기보다 왜 대중이 지금 시점에서 동양학에 관심을 갖는지가 중요하다”며 “IMF로 시스템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초유의 경험을 한데다 실직자들과 홈리스들이 뒹구는 한편에서 벼락부자가 양산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심화, 지도층의 부패에 따른 사회불신 등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정체성의 혼란에 빠진 현대인들의 왜 사는가? 행복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 갈망들이 표출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젊은 전문가들의 모임인 ‘21세기 프론티어’는 최근 ‘노자와 장자’라는 이름의 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은 대학때 전자공학 전기공학 기계공학 등을 전공한 컴퓨터회사중역 변리사 정부기관전문위원 등 동양철학과는 전혀 연관이 없던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3월엔 ‘노장페스티벌(가칭)’이라는 이름의 사이버토론회도 연다.
▼ 스님책 붐 참선시민 급증 ▼
출판계에서는 법정스님을 비롯한 승려들의 수행기가 붐을 이루고 참선이나 명상 등에 관심을 갖는 층도 두꺼워지고 있다. 올 겨울 승려들의 수행기간(동안거)동안 일반 사람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던 서울 강북구수유동 화계사에는 예년에 없이 20여명이 넘는 직장인들이 일주일이나 10일 단위로 행사에 참석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시민선방’을 운영중인 서울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에도 신청자가 쇄도해 저녁시간으로 참석을 제한하는 직장인반을 따로 만들었다.
이같은 참선 수행붐은 아예 ‘출가’로까지 연결돼 매년 100명 남짓 새로운 승려들이 배출돼오던 한국불교 태고종에는 작년 하반기 199명이 계를 받아 불교계를 고무시켰다.
▼ 생산중단 LP판 다시 각광 ▼
옛것을 통해 아날로그 문화를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CD와 MP3 등 디지털 음반이 주류를 이루는 한가운데서 90년 이후 생산이 중단된 LP가 각광을 받는 것도 그 중 하나. 서울중구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LP를 파는 한 상인은 “CD가 보급될 때만 해도 너도나도 LP를 내다 팔았는데 요즘은 파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오래된 LP판이 하루 10여장씩 팔리고 있다”며 “몇몇 마니아들 사이에서만 국한됐었으나 요즘엔 일반사람들이 많아 세태변화를 실감하고 있다”고 전했다.
가볍고 작은 휴대전화가 홍수를 이루는 가운데서도 크고 무거운 아날로그 휴대전화만을 고수하는 골수팬들도 있다. 88년 개시된 아날로그 휴대전화서비스는 96년 디지털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96년 229만명, 97년 156만명으로 하향세로 돌아서긴 했지만 현재 5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보상판매’라는 당근에도 아랑곳없이 아날로그를 고수하고 있다.
회사원 김모씨(43)는 “90년에 장만한 아날로그를 그대로 쓰고 있는데 음성이나 문자전송등 최신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통화에는 불편이 없다”며 “비싼 돈을 주고 산 것인데다 사람들이 너무 새로운 것에만 우르르 몰려가는 느낌이 들어 골동품차원에서라도 바꾸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