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열심히 하겠다’는 말로 통하는 시대는 지났다. 몸으로 때우기만 하면 되었던 시대는 지났다. 디지털 시대에는 ‘현명하게 일하겠다’고 말해야 한다.”
‘현명하다’는 말의 의미는 ‘디지털 시대의 생존법’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김본부장은 이날 현대 각 계열사의 구매 생산 판매 등 모든 업무를 전산화하는 작업을 이달 말까지 끝내고 그룹의 계열사 협력회사 벤처회사가 모두 참여하는 현대 포털사이트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현대 각 계열사를 인터넷비즈니스 시대에 맞는 회사로 탈바꿈시키겠다는 요지.
LG그룹도 이날 전자부분 계열사 사장단 회의를 열고 인터넷 기술개발과 벤처 네트워크 구축에 올해 2000억원을 집중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최근 데이콤을 인수하고 유무선 통신과 정보통신관련 사업을 다른 그룹보다 빨리 수직 계열화하는데 성공한 LG가 다른 그룹의 추격을 따돌리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한 것.
‘몸이 무거운’ 현대가 인터넷 사업진출 의지를 밝힘으로써 2월18일 삼성 이건희회장이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전자 및 정보통신 사업에 32조원을 투입하겠다”고 선언한 뒤 주요 그룹들이 앞다투어 발표한 정보통신분야에 대한 투자확대 및 인터넷 사업진출 구상이 대부분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선언적인 의미’에서는 마무리된 셈이다.
각 그룹의 발표내용은 △기존 업무를 정보화기술(IT)과 접목시켜 효율화 △전자 및 정보통신 계열사에 대한 투자확대 △기존 사업기반을 이용, 인터넷 사업에 진출 및 종합상사의 인터넷 지주회사화 △벤처사업 투자 등 4가지로 요약된다.
결국 디지털시대에도 재벌이 한국경제를 이끌어가겠다는 뜻. 일부에서는 회사이름에 닷컴(.com)만 붙여 투자자를 기만하려는 중소기업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이언오이사는 “각 재벌의 발표는 구조조정을 일단락짓고 이미 시작된 디지털 혁명의 물결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하고 “어느 재벌이 새로운 게임에서도 승자가 될지 또 모두 적응에 실패할지는 아직 미지수”라고 말했다. 이이사는 또 “디지털시대에는 유연함 속도 창의성이 키워드인데 각 그룹의 발표에는 ‘사람’과 관련된 내용이 빠져있다”고 지적했다.며 “대기업은 그들의 정신적인 유전자에 뿌리박힌 ‘대기업병’을 털어내지 않는 한 디지털시대에서의 생존은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벤처업계는 대기업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박수를 치는 분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경계하는 눈치. 미래산업의 정문술사장은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으로 재벌이 벤처에 투자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며 “대기업이 머니게임에 뛰어들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기술력 있는 벤처기업에 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중소기업이 가꿔놓은 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어 ‘빵’을 가로채고 중소기업의 핵심인력을 빼가던 그동안의 대기업 체질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벤처업계의 염려.
지난해말 창업한 벤처사업가 유모씨(35)는 “10여년 간 대기업 기조실에서 근무하면서 오너 독재체제에서는 도저히 내 꿈을 펼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회사를 그만뒀다”며 “재벌이 얼마나 변할지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한편 김재수본부장은 이날 “전문경영인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현대 오너들이 이번 주총에서 이사를 그만둘 것”이라고 밝혀 정주영현대명예회장과 정몽준의원(무소속) 등 현대중공업의 대주주들이 경영에서 손을 뗄 것으로 관측된다.
<이병기·홍석민기자>ey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