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월드]신영웅전설3-하얀마녀

  • 입력 2000년 6월 4일 19시 49분


어른이 되는 건 힘든 일이다. 거꾸로 매달려서 사흘 밤낮을 견디거나 맨몸으로 사자를 잡아와야 성년식을 통과하는 게 아니라도 그렇다. 성장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세상은 어렸을 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곳이다. 계속 아이인 채로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옛날, 하얀 머리카락의 여자아이가 티라스윌 지방을 여행했다. 그녀는 미래를 아는 힘을 갖고 있었다. 좋은 예언을 들은 사람들은 그녀를 찬미했지만 나쁜 말을 하면 마녀의 저주라며 매도했다. 그러다 하얀 마녀는 모습을 감췄고 20년이 흘렀다. 시골 마을의 쥬리오와 크리스는 성인식으로 순례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하얀 마녀의 자취를 따라 가는 것이기도 하다.

즐거운 고향 마을과 달리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고, 카지노 덕분에 잘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 헐벗었다. 살기가 힘들어서 정든 고향을 억지로 떠나야 하는 모자가 있고, 친구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 싫어 일부러 전송을 안 나가는 꼬마가 있다.

놀라운 건 이들의 여행이 게임 속 일이 아니라 내가 직접 겪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거창한 이야기를 거만하게 내놓는 게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일들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떠들썩한 2인조 도둑 사라와 구스나 부모의 원한을 갚겠다며 반바지나 입고 설치는 로디는 너무 친근하게 느껴져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다.

여행하며 겪는 사건들은 잊혀져 가는 어렴풋한 기억들을 자극한다. 강에 물건을 빠뜨리자 온 마을 사람들이 튀어나와 찾느라고 법석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서로 도울 수 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척박한 땅에서 아무 희망 없이 살던 사람들이 떠돌이 음유시인의 연주로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린다.

그리고 하얀 마녀의 전설이 있다. 마녀가 지나간 길을 따라가며 그녀의 슬픔과 좌절을 느낀다. 툭하면 쥬리오를 윽박지르는 말괄량이 소녀와 길도 제대로 못 찾는 울보 소년이 어른이 돼 간다. 때론 세계를 파멸시키려는 악당에 맞서 세상을 구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 게임의 주제는 아이들의 눈으로 본 세상, 즉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어린아이의 아름다운 꿈은 깨졌다. 세상은 그런 곳이 아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었다고 타협하고 찌드는 건 또 아니다. 투명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이제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세상을 알게 됐지만 거기 빠져버리지 않는 아이들의 걸음은 현실에선 주어지지도 않았던 갈림길이다. 선택하기도 전에 빼앗겨버렸던 길. 늘 잊고 살지만 가끔 어렴풋이 생각나기도 한다. 정말 다행인 건, 나이가 들수록 점점 기억이 희미해진다는 점이다. 그러지 않으면 곤란하다. 자꾸 생각나면 안된다.

박상우(게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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