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사이언스는 국내의 석학 3인을 초청, 20세기 초반 천재 물리학자들이 숱한 지적 방황과 개념적 혼란을 극복하면서 완성했고, 지금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양자론의 전개과정과 그 의미를 짚어본다. 》
▼참석자▼
김정욱(金正旭) 고등과학원 원장(이론물리학), 임경순(任敬淳)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과학사), 장회익(張會翼) 서울대 물리학부 교수(과학철학)(이름 가나다 순)
사회:김두희(金斗熙) 동아사이언스 대표
장소:동아일보사옥 14층 회의실
일시:2000년 9월 29일 오전9:30∼11:30
▽김두희:이렇게 자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자론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 앞서 우선 ‘양자’라는 용어의 개념을 명확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장회익:양자(quanta)란 불연속적인 물리량을 말합니다.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미시세계에서는 에너지의 흐름을 비롯한 많은 물리현상이 불연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우리가 익숙한 고전역학의 세계와는 전혀 다르죠. 뉴턴의 방정식에서는 모든 값이 연속적으로 변화하지 않습니까?
▽김정욱:그렇습니다. 고전역학은 흙으로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합니다. 필요에 따라서 적당량을 더하거나 뺄 수 있지요. 반면에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쪼갤 수 없는 벽돌로 집을 짓는 셈이지요. 따라서 창틀이나 문의 크기도 벽돌의 정수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김두희:양자론의 등장을 전후한 당시의 과학계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김정욱:19세기 후반은 뉴턴의 고전역학이 완성된 시기입니다. 플랑크의 지도교수조차 그에게 “이제 물리학은 끝났다”며 다른 연구를 하도록 충고했을 정도였죠. 그러나 플랑크는 아주 꼼꼼한 사람이었고 또 매우 정직했습니다. 그는 기존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관찰결과를 두고 여러 각도에서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임경순:그 뒤 20대의 젊은 물리학자들이 이 대열에 대거 뛰어들게 됩니다. 고전역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 뒤에는 뭔가 심오한 이론이 있다는 공감대가 퍼져 나갔던 것이죠. 이들은 제 2의 뉴턴을 꿈꾸는 천재들이었습니다. 반면에 기성 과학자들은 자신의 토대를 스스로 부정할 용기가 없었죠.
▽김두희:당시 물리학계의 세대교체가 자연스럽게 일어난 셈이군요. 그런데 양자론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부분은 빛과 물질의 ‘파동―입자 이중성’인 것 같습니다. 물질이 이중성을 갖는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 발견됐습니까?
▽임경순:역사적으로 많은 물리학자가 빛의 실체를 밝히는 일에 뛰어들었죠. 뉴턴은 빛이 입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곧 회절이나 간섭처럼 빛을 파동으로 생각해야만 해결되는 현상이 관찰됐습니다. 결국 물리학자들은 관찰 방식에 따라 빛이 입자 또는 파동으로 보인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오랜 시행착오 끝에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1924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루이 드 브로이는 전자 같은 입자도 파동성을 갖는다는 ‘물질파이론’을 내놓게 됐습니다.
▽장회익:이를 바탕으로 1926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오늘날 물리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파동방정식’을 세우게 됩니다. 입자의 행동을 파동으로 기술하는 수식입니다. 양자가설이 양자역학으로 물리학의 역사에서 자리매김한 것이지요.
▽김정욱:사실 슈뢰딩거조차 자신이 만든 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결국 이듬해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보른이 파동방정식의 의미를 해석합니다. 물질이 어떤 지점에 존재할 확률은 그 지점의 진폭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지요. 아인슈타인은 끝내 이런 확률적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보른에게 보낸 편지속에 등장하는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는 말도 바로 이런 의미이지요.
▽장회익:사실 양자론에 익숙한 물리학자조차 자신이 정말 이 이론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되묻곤 합니다. 양자론의 핵심개념인 ‘불확정성의 원리’를 제안한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조차 “사람이 정확하게 볼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실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상의 위치를 정확히 서술하려고 하면 그 운동량을 모르고, 운동량을 정확히 서술하려면 위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불확정성입니다. 고전역학적인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김정욱:예를 들어 지금 저는 여기 앉아 있지만 제가 건넛방에서 발견될 확률도 있습니다. 물론 매우 작은 값이겠지만요. 실제로 원자의 세계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김두희:우리의 존재가 확률적이라는 혼란스러운 이론을 굳이 일반인들이 알 필요가 있을까요?
▽임경순:양자론이 이론가들의 지적 유희라면 모르겠지만 오늘날 과학문명의 상당 부분이 양자론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핵폭탄이나 핵발전소 등 막대한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원자력기술을 비롯해서 분자의 구조분석을 통해 수많은 신물질을 만들어 내는 화학, 전자의 흐름을 조절해서 정보를 관리하는 반도체 등 수많은 분야가 양자론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죠. 양자론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을 겁니다.
▽김정욱:요즘 각광받는 분자생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리학자였던 프란시스 크릭이 생명현상을 양자론적 관점에서 해석한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생물학에 뛰어들어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함께 DNA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했으니까요. 한마디로 20세기는 양자혁명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두희:양자론은 상대성이론보다 일상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상대성이론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익숙한데 왜 양자론은 10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일반인에게는 용어조차도 생소한 채 남아 있을까요?
▽김정욱:상대성이론에는 일반인의 관심을 끌 극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인슈타인이라는 20세기 최고 천재의 개인 드라마가 있고, 부적절한 비유일망정 타임머신처럼 일반인에게 상대성이론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방법이 있었죠. 반면에 양자론은 부각시킬 만한 영웅이 없었고 이 이론의 성립에 관여한 물리학자 대부분이 양자론 자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물리학자가 이럴진대 일반인에게까지 양자론을 설명할 여유가 없었죠.
▽김두희:한편으로는 양자론을 알기 쉽게 설명하려는 시도도 없지않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프리쵸프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같이 양자론을 동양철학에 빗대어 본다든지...
▽장회익:양자역학은 인과론적으로 꽉 짜인 고전역학의 틀을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서구사상보다는 유연함을 갖고 있는 동양사상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자론과 동양사상에 나타나는 개념들을 무리하게 연결시키는 것은 곤란하지요. 외견상 비슷해 보이는 개념이라 하더라도 그 쓰이는 맥락이 전혀 다르니까요.
▽김두희:뉴턴의 역학이 새로운 세계관을 열었듯이 양자론 역시 인간의 사고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까?
▽임경순:뉴턴의 역학은 당시 사람들에게 경탄의 대상이었습니다. 낙하운동이나 포탄의 궤적 을 정확히 예측했으니까요. 사람들은 대상에 대한 정확한 정보만 있으면 그 미래를 알 수 있다고 믿게 됐습니다. 반면 양자론이 주는 메시지는 우리가 확실한 실체라고 믿고 있던 세계가 사실은 확률의 법칙을 따르는 불확실성에 기초한다는 점입니다.
▽장회익:양자론을 통해 사람들은 인식 주체가 대상의 상태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대상의 상태는 관찰 전후에 불연속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식주체와 대상 사이의 새로운 인식론적 문제가 발생합니다.
▽김두희: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하나는 현실세계에, 하나는 미시세계에 독립적으로 적용하는 법칙인가요?
▽장회익:고전역학은 양자역학의 한 근사적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익숙한 세상처럼 원자나 분자가 아주 많아지면 양자역학의 수식은 고전역학의 수식에 아주 가까워집니다. 현실세계에서는 원자의 세계와 비교할 때 불확실성이 매우 낮아지므로 모든 것이 확실해 보일 뿐입니다.
▽임경순:양자역학에 따른 현상을 우리 눈으로 전혀 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항이 제로인 초전도 현상이나 극저온에서의 초유동체 현상은 고전역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죠. 일반인들이 이런 현상을 보면 당황하게 됩니다.
▽김두희:앞으로 양자론은 어떻게 발전해 나갈까요?
▽김정욱:주로 소립자물리학이나 고체물리학에서 적용되는 양자역학은 어느 정도 완성됐습니다만 상대성이론과 접목한 양자장이론이나 중력과의 통합을 모색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 등에 많은 과학자들이 매달리고 있습니다. 양자론은 앞으로도 양자적인 도약을 통해 계속 진화할 것입니다.
▽임경순:21세기는 양자공학의 시대라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 양자컴퓨터나 나노 테크놀로지 등 양자론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응용연구가 한창입니다. 이제 양자론이 물리학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시대는 끝났다고 할까요?
▽김두희:한번의 좌담으로 양자론을 이해하겠다는 것은 욕심이겠군요. 어렵다고 외면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이론적 토대를 인내심을 갖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장시간 말씀에 감사합니다.
<정리〓강석기동아사이언스기자>alchimiste@donga.com
▼양자론 이 책 참고하세요▼
양자론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를 원하는 독자들은 국내에 번역돼 나온 아래의 책과 잡지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과학동아’ 10월호 특집, ‘자연을 해석하는 혁명적 언어 양자역학’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지식산업사), ‘양자역학이 사고전환을 가져온다’(윤당) △프리쵸프 카프라,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범양사) △스즈끼 타쿠지, ‘그림으로 배우는 양자역학’(한승) △도모나가 신이치로 ‘양자역학의 세계상’(전파과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