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이 나타났다. 어떻게 할 것인가?’ ‘돌을 집는다’ 등등 텍스트 어드벤처라고 불리던 게임들에서 세계는 게이머의 머리 속에만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걸 보여줄 수 있다. 실사와 다를 게 없는 그래픽이 모니터 속에서 숨가쁘게 펼쳐진다. 굳이 상상할 필요가 없다. 보이는 것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
그런데 과학 기술의 승리를 찬미하지 않는 게임이 하나 있다. ‘에인션트 도메인 오브 미스테리’는 로그라이크 롤 플레잉 게임이다. 로그라이크 게임에는 그래픽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모든 상황은 글로 설명된다. 아스키 문자로 표현된 지형이나 캐릭터 묘사가 보조적으로 제공될 뿐이다. 예를 들어 ‘&’로 표시된 건 숲이고, ‘^’는 산이고 ‘@’는 주인공 캐릭터다. 주인공은 어느 날 고향 ‘안카르디아’에 몰아 닥친 카오스의 힘에 맞서 모험을 시작한다. 플레이할 때마다 달라지는 던전을 탐험하며 수수께끼를 풀고 퀘스트를 해결한다.
게임 진행은 꽤 어렵다. 자세히 보기, 트랩 설치, 계단 오르기, 귀기울여 듣기 등 키보드의 거의 모든 키를 사용할 정도로 다양한 행동이 있다. 각 행동별로 일정한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때에 맞춰 음식을 먹어야 한다. 상황에 따라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곤란한 건 물론이고 휴대 식량의 무게에도 제한이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그림 하나 없이 골치 아픈 시스템. 하지만 이 게임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 바로 상상력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따라갈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게 더 화려하고 웅장하고 신비롭다. 기술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상상력에는 어떤 제한도 없다. 더 중요한 건 모두 각각 다른 꿈을 꾼다는 것이다. 오직 자신만의 은밀하고 개인적인 꿈이다.
‘에인션트…’의 세계를 탐험하다 보면 아스키 문자 ‘D’가 불을 뿜는 집채만한 용으로 느껴진다. 평범한 좀비 ‘z’와 두목 좀비 ‘Z’의 차이는 단지 대, 소문자의 차이지만 다른 무게로 와닿는다.
게임 ‘산업’이 발전하면서 게임은 경험하는 게 아니라 보여주는 거라는 사고방식이 점점 더 득세하고 있다. 하지만 게이머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것은 게임 자체가 아니라 게이머의 꿈이다. 게임은 그 꿈을 부추기고 다독거릴 뿐이다. ‘에인션트 도메인 오브 미스터리’에서는 게임성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모험을 끝내면 새겨지는 여행의 비망록을 읽으면서 언제든 그 때 꾸었던 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박상우(게임평론가)sugulman@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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