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분교의 스래트킨 교수 연구팀은 지난 100년 간 아프리카에서 에이즈에 감염된 후 발병에 이르는 시기를 늦추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의 비율이 증가했다는 사실을 5월 31일자 ‘네이처’에 발표했다.
논문에 따르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에이즈 발병에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진 CCR5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인해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들 가운데 에이즈 바이러스에 보다 강한 저항력을 가진 사람들의 비율이 에이즈가 퍼지기 시작한 뒤 40%에서 현재 50% 이상으로 증가했다. 반면 쉽게 에이즈 증세가 나타나는 사람들의 비율은 20%에서 10%로 줄었다.
CCR5는 면역세포 표면의 수용기를 만드는 유전자이다. 에이즈 바이러스는 세포에 침입하기 전 이 수용기에 결합하기 때문에 만약 수용기의 형태가 변하거나 아예 없다면 에이즈 바이러스가 면역세포에 침입할 수 없게 된다.
연구팀은 CCR5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진 환자들의 경우 에이즈 잠복기가 늘어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까지 살아남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같은 유전자를 가진 자손을 많이 퍼뜨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에이즈 잠복기는 7.8년에서 8.8년으로 1년 가량 늘었다.
진화론을 주창한 다윈은 더 많은 자손을 낳을 수 있는 돌연변이가 자연선택된다고 주장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에이즈 저항성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쉽게 감염되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에 비해 아이의 수가 평균 10∼20% 정도 많았다.
이번 연구는 질병이 인류의 진화과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처음으로 입증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페스트, 홍역, 수두와 같은 전염병들로 인해 이들 질병에 강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자연선택됐다고 믿고 있지만 유전학적인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었다.
한편 북유럽에는 아프리카에서 발견되는 것과 다른 또 다른 CCR5 유전자의 돌연변이형이 있다. delta-32로 불리는 이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에이즈에 완벽한 저항력을 가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학자들은 이 delta-32 유전자 역시 700년 전부터 어떤 질병으로 자연선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14세기 유럽에 창궐했던 페스트가 그 원인이 아닌가 보고 있다.
반면 슬래트킨 교수는 “페스트보다는 주로 어린이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홍역과 같은 질병이 그 원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영완동아사이언스기자>puse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