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이노베이션 현장을 가다-6]한국의 실리콘밸리

  • 입력 2001년 7월 16일 18시 37분


“국내 벤처업계의 옥석 가리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기업이 생존경쟁의 사투를 경험한 뒤에야 진짜 벤처와 무늬만 벤처의 구별이 명확해질 것입니다.”

대표적인 일본계 벤처캐피털인 소프트뱅크파이낸스코리아(SBFK)의 다카하시 요시미 대표는 아직 한국 벤처기업이 글로벌스탠더드에 크게 미달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돈은 충분히 쌓아놓고 투자기업을 찾고 있지만 투자수익을 올릴 만한 기업도 많지 않고 적정가치로 돈을 투자할 수 있는 기업은 더더욱 찾기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SBFK는 일본 소프트뱅크파이낸스(SBF)로부터 언제든지 수천억원을 조달할 수 있는 벤처캐피털. 벤처기업이 수없이 생겨나고 돈을 필요로 하는 기업도 많은 상황에서 대표적인 벤처캐피털이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심각한 수급불균형의 상태로 볼 수 있다. 기업은 돈 구할 데가 없고 벤처캐피털은 돈 줄 데가 없고….

그는 “조금만 이름이 알려진 한국기업은 액면가의 10배 이상의 투자를 요구하는 잘못된 관행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동안 벤처캐피털들이 냉정하게 기업가치를 판단해 투자하지 않고 대박의 꿈만을 좇아온 데 따른 폐해가 아직 가시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 글 싣는 순서▼
1. 일대일(1:1) 마케팅
2. e풀필먼트
3. 사이버금융
4. 지식경영
5. e엔터테인먼트
6. 한국의 실리콘 밸리
7. e정부
8. 정보가전

손정의(孫正義)씨가 이끄는 일본 소프트방크(SB)는 지난해 투자액 1조5000억엔 중 60%를 액면가에 투자했고 30%는 액면가의 3배 이하에 투자했다. 3배를 넘는 경우는 10%에 불과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올해 SBFK는 20여개 국내 기업에 500억원을 투자했는데 3배 이하 투자원칙은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다.

인터넷 벤처 거품론과 함께 국내 대형 벤처캐피털들도 성장 가능성보다는 돈을 벌 수 있는 기업에 투자하려는 쪽으로 투자패턴이 급선회하고 있다. 지난해초까지만 해도 ‘닷컴’이라는 명함만 내밀면 5배 이상의 투자제의가 밀려들었지만 요즘에는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탄탄한 수익모델을 갖추지 못한 경우라면 액면가에 투자를 받기도 쉽지 않은 상황.

KTB네트워크 이영탁 회장은 “닷컴기업의 경우 새로운 창업 아이디어가 거의 고갈된 상태인데다 추가 투자를 유치하려는 기업들은 투자메리트가 없어 신규 투자가 급감하고 있다”고 벤처캐피털 업계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벤처캐피털의 투자패턴이 바뀌면서 바이오와 엔터테인먼트, 소재 부품 분야가 관심을 얻고 있다.

KTB네트워크의 2000년 포트폴리오를 살펴보면 전체 2767억원의 투자금액 중 정보통신 분야에만 60%가 넘는 1906억원이 할당됐지만 올해 상반기에는 274억원의 투자금액이 바이오와 부품소재 엔터테인먼트 쪽에 골고루 나눠졌고 정보통신쪽에서도 ‘비인터넷(non-internet)’ 분야에 50억원 이상의 돈이 투자됐다.

바이오산업은 이익을 내는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이 필요하지만 기술의 상품화에 성공만 하면 닷컴기업의 수백배에 이르는 수익을 낼 수 있다는 폭발력이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벤처캐피털의 이 같은 투자패턴은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산업협력재단이 기업체와 벤처캐피털 384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결과에서도 잘 나타난다. 조사 결과 투자자금 유치가 활발할 것으로 예상되는 업종에는 환경 바이오분야가 30%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정보통신(23%) 엔터테인먼트(17%) 소재 부품(8%) 소프트웨어(8%) 등으로 나타났다.

투자업종이 바뀌는 것과 동시에 투자시스템도 혁신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국내 벤처캐피털은 요즘 신규투자보다는 사후관리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는 것.

투자기업의 기업가치를 키워 기업공개에 성공할 때까지 철저하게 관리하는 시스템을 앞다퉈 도입하고 있다.

대표적인 국내 벤처캐피털인 KTB네트워크는 이를 위해 현재 ‘사후관리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투자 벤처기업간의 네트워크 구성은 물론이고 대학과 컨설팅사, 로펌, 종합상사 등과 제휴해 기업들이 기업활동을 해 나가는 데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네트워크 안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것.

현재 15개 기관 및 대학이 제휴리스트에 올라 있다. 이 밖에도 부산 대구 광주 등 지방 자치단체를 지역투자조합에 포함시켜 행정적인 지원도 받을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이 같은 사후관리 시스템은 미국 실리콘밸리의 투자기업 사후관리모델에서 유래한 것인데 벤처캐피털이 태동기에서 성장기로 접어들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해석하고 있다.

벤처업계의 효과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벤처산업의 경쟁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도 요즘 벤처업계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SBFK의 다카하시 대표는 “한국에는 아직 글로벌스탠더드에 미달하는 벤처들이 수두룩하게 많다”며 “효과적인 벤처업계의 구조조정을 위해서라도 무분별한 벤처투자는 금물”이라고 단언한다.

당장 회사의 이익이 조금은 줄더라도 냉정한 기준으로 벤처기업에 투자해야 장기적으로 벤처도 살고 벤처캐피털도 살 수 있다는 논리다. 그는 국내 벤처캐피털들이 장기적인 벤처산업 육성을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옥석가리기에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헛되이 낭비한 시간과 돈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신뢰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투자자의 바람도 벤처업계가 되새겨볼 대목이다.

<박정훈기자>sunshade@donga.com

▼전문가 한마디 : 한국의 실리콘밸리 키우려면 인재양성부터▼

최근 실리콘밸리가 조정기를 겪고 있지만, 현지의 표정은 여전히 낙관적이다. 실리콘밸리는 여전히 모든 국가와 지역의 벤치마킹 대상이다. 실리콘밸리 벤처기업들이 세계경제를 주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역시 실리콘밸리가 구축하고 있는 인적 네트워크 중심의 생태계(Habitat)에서 찾을 수 있다.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네 주역은 대학, 벤처기업가, 벤처캐피털리스트, 그리고 정부다.

실리콘밸리의 7000여개 하이테크 기업에는 미국과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유능한 기업가들이 있다. 이들 기업은 서로 공급사슬로서 그리고 전략적 파트너로서 연결되어 협력과 경쟁을 통해 공동진화(co-evolution)를 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리스트 중에는 사업경험이 있는 엔지니어 출신이 많아 사업과 기술에 대해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투자 심사에서 될 기업과 안 될 기업을 골라내는 필터 역할을 해 왔다. 그렇지만 그들은 투자 이전보다 투자 이후에 포트폴리오 기업에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 이사회 참여 등을 통해 투자기업의 성공에 도움이 되는 일에 모든 역량을 동원한다. 그들은 시장 진입 이전의 벤처기업들에 시장과 고객의 역할을 하는 실리콘밸리 생태계를 지키는 파수꾼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정부’를 듣도 보도 못했다는 사람들은 실리콘밸리의 꼬리만 보고 머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축구장에서 선수들과 함께 뛰지는 않지만 훌륭한 프로모터와 심판의 역할을 해왔다. 미국 연방 및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기업하기 좋은 제도와 법률의 제정을 통해, 기초연구 투자를 통한 새로운 기술지식 및 기회의 창출을 통해, 그리고 우수한 기술 및 제품 구매자로서의 역할을 통해 벤처 발전의 기반을 조성하고 있다.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서울벤처밸리와 대덕밸리가 거론되고 있고, 또 많은 지역에서 벤처집적단지를 조성하는 노력이 활발하다. 중장기 관점에서 선순환이 가능하려면 먼저 거점대학의 연구 및 인력양성 기능을 높이는 것이 첫째다. 다음은 성공한 벤처기업가의 역할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사업기회를 가진많은 유능한 인력들이 이를 보고 벤처기업가로 나설 때, 벤처캐피털리스트의 역할과 역량도 함께 발전할 수 있다.

배종태 교수(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ztbae@kgsm.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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