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외국어 어른돼서도 잘할 수 있다

  • 입력 2002년 1월 13일 18시 00분


《조기 영어 교육 열풍이 불고 있다. 한달 수업료 100만원이 넘는 영어유치원이 우후죽순 생기고, 어린이 영어과외, 해외연수가 유행이다.

영어 조기 교육은 언어 습득에 ‘결정적 시기’가 있다는 가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어려서 말을 배워야지 이 시기가 지나면 ‘기회의 창’이 닫혀 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이 가설을 반박하는 연구결과가 뇌연구, 심리학, 언어학, 교육학 분야에서 계속 나오고 있다. 이미 영어를 포기한 어른, 아이 교육비를 마련하지 못해 고민하는 부모에게는 희소식이다.》

결정적 시기 가설은 1967년 미국의 언어학자 에릭 레너버그 교수가 ‘언어의 생물학적 기초’란 책에서 제기했다.

그는 인간의 언어 습득은 뇌나 발성기관의 발달 특성 때문에 사춘기가 지나면 어렵다고 주장했다. 또 MIT 언어학자 스티븐 핑커 교수는 6세부터 사춘기까지를 결정적 시기라고 했다.

캘리포니아법원은 1998년 이민자 자녀가 영어를 배우는 최적의 시기는 만 3∼5세, 늦어도 사춘기까지라고 밝혔다.

그동안 과학자들은 뇌 활동과 미국 이민자의 영어 실력을 분석해 결정적 시기 가설의 타당성을 검증해 왔다.

막스플랑크연구소 신경과학자인 앙겔라 프리데리치 박사는 결정적 시기 가설을 부정하는 연구 결과를 미국과학아카데미 회보 최근호에 발표했다. 그는 객관적 분석을 위해 ‘브론칸토’라는 인공언어를 가르치고 뇌의 활동을 관찰했다. 그 결과 뇌의 전기적 활동은 인공언어를 처리할 때나 모국어를 할 때나 똑같은 패턴을 나타냈다. 지금까지는 ‘결정적 시기 가설’에 따라 모국어와 나중에 배우는 외국어는 다른 방식으로 뇌에서 처리된다고 생각해왔다.

미국 스탠포드대 교육학자 겐지 하쿠다 교수는 인구센서스를 활용해 중국과 스페인계의 이민자의 이민 시기별 영어 능력을 조사했다. 최근 제출된 그의 논문에 따르면 일정 나이가 지나면 영어 능력이 뚝 떨어지는 현상은 없었다. 그는 “결정적 시기 가설은 근거가 희박하며, 단지 나이가 들수록 완만하게 언어습득 능력이 떨어지는 것일 뿐이다”고 말했다.

미국 맥길대 프레드 기니시 교수가 다른 이민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도 결과는 비슷했다. 이 조사에서는 놀랍게도 어른이 된 뒤 이민한 사람의 3분의 1은 어려서 이민한 사람 또는 미국 본토인과 같은 수준의 영어를 구사했다. 그는 외국어 습득 능력을 좌우하는 것은 나이 외에도 가정의 경제력, 인지능력, 교육정도 등 사회적 요인이라고 밝혔다.

뉴욕시립대 지셀라 시아 교수는 아예 ‘결정적 시기 가설’ 대신에 ‘주요사용언어 교체 가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민 온 어린이가 영어를 잘 하는 것은 학교에서 영어를 쓸 수 밖에 없는 반면 어른은 모국어를 계속 쓰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영어를 못한다는 것이다.

‘느림보 학습법’을 펴낸 연세대 의대 소아정신과 신의진 교수는 “언어 능력은 듣기 쓰기 말하기 독해 문법 등 여러 영역에 걸친 종합적인 능력으로, 각 영역의 발달 시기는 나이에 따라 다르다”고 말한다. 즉 발음 능력은 어려서 발달하지만 단어 능력은 뇌의 측두엽이 발달하는 초등학교 때, 언어의 논리성은 초등 2-3학년이 넘어야 터득한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6세 미만에 아이의 인성과 사회성 발달이 대부분 이루어지는 데, 이 때 아이에게 영어만 강요하면 주체성에 혼란이 생겨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EBS의 순수토종 영어 프로그램진행자인 이보영 씨는 “영어를 어려서 가르치면 노력 안하고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이라고 말한다.

이 씨는 “어른들 가운데서도 해외 근무 등 뚜렷한 목적이 생겨 나중에 공부를 한 사람 가운데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씨는 “특히 어른은 단어, 정보처리능력 등 선행 지식을 많이 갖고 있다는 점이 장점이어서, 어른은 CNN 방송의 문장을 몇 개의 키워드만 들어도 이해할 수 있지만, 어린이는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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