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인재 이탈현상 심화 등 과학기술인력 수급문제가 우려할 만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장기적으로 국가경쟁력의 기반을 치명적으로 잠식할 이 같은 추세는 안이한 과학·교육정책과 제도가 개개인의 ‘쉽고 편하게 돈 많이 벌기’ 풍조와 맞물려 확산일로에 있다. 고급 인력 양성도 미비하고, 기껏 길러도 해외로 유출되는 과학기술교육의 현황은 국가의 장래를 기약할 수 없게 하고 있다. 주요 강국들은 과학기술인력의 양성을 과거에도 미래에도 국가전략의 변함없는 최우선순위로 삼고 있다. 이들 국가로부터 귀중한 교훈을 받아야 할 절박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5개 과학선진국이라 할 미국 러시아 프랑스 중국 일본의 과학교육정책의 노하우를 들여다보는 이유다.》
◇미국
세계 유일 초강대국답게 미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엄청난 투자와 외국의 고급 인력 유치 등을 통해 과학 기술을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육성하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4일 의회에 제출한 2003 회계연도(10월∼내년9월) 예산안 중 과학 기술 관련 예산안은 1183억달러로 전년 대비 8.3%가 증가했다. 이는 미국을 제외한 선진 7개국(G7)의 과학 기술 관련 예산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국방관련 예산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예산지출을 최대한 억제해 적자예산을 편성한 상황에서도 과학 관련 예산이 증가했다는 것은 과학 분야를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미국이 정부 예산과 기업, 연구소 등 민간 분야의 연구개발비를 포함해 연간 과학 기술 분야에 투자하는 돈은 2600억∼2700억달러 수준으로 세계 모든 국가의 연간 과학 기술 투자비 총액(약 5000억달러)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긴축예산때도 과학투자 늘려
국적 불문하고 우수인력 유치▼
미국은 먼저 산업혁명을 경험했던 영국 등 유럽의 영향 때문에 일찌감치 과학에 눈을 떴다. 1950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국립과학재단을 설립해 과학발전을 장려하고 건강 번영 복지 등을 증진하도록 한 것이 체계적인 과학 기술 발전의 토대가 됐다. 1959년 구 소련이 미국에 앞서 스푸트니크 우주선을 발사한 것도 커다란 자극이 됐다.
90년대 미국의 최장기 호황을 뒷받침한 것은 정보통신 분야를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이었다. 신경제 옹호론자들은 미 경제가 최근 침체에도 불구하고 과학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성장을 계속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미국은 넘치는 과학 인력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외국의 우수한 인력에 대해선 이민 문호를 적극적으로 개방해 왔다. NSF가 2000년 창립 50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과학 기술 지표 2000’에 따르면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는 미국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는 97년 기준 770만4000명으로 이 중 외국 출신은 19.38%인 149만3600명이다.
국가별로는 인도(18만4900명) 중국(13만1300명) 필리핀(9만2800명) 독일(8만4100명) 영국(7만4600명) 캐나다(7만2700명) 대만(6만8100명) 한국(5만3000명) 순.
이 모든 것의 기반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실험 실습을 강조하는 과학교육 및 영재교육을 통해 과학인력을 꾸준히 양성하고 있는 미국의 교육제도가 있음은 물론이다.
워싱턴〓한기흥 특파원 eligius@donga.com
◇러시아
소련 붕괴 후 경제난 속에서도 러시아 과학기술, 특히 기초과학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체계적이고 방대한 과학 기술 교육 제도와 풍부한 인적 자원이 그대로 남아있는 가운데 지난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지시로 과학 기술 진흥을 위한 지원책이 마련됐다.
푸틴 정부의 과학 기술 정책 자문역을 맡고 있는 모스크바국립전기공업대(MGIE)의 이고리 리트바크 교수는 “물리 수학 등 기초과학 분야의 수준은 여전히 서방에 비해 우위에 있다”며 이는 최근 러시아 정보기술(IT) 산업의 급성장 배경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과학 기술 교육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소련 시절부터 이어져온 영재교육 체제. 모스크바에만 15개의 과학특수학교(과학고)가 있다. 러시아 학제는 초중등 구분없이 11학년의 학교(슈콜라) 교육 후 대학으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과학특수학교는 한국의 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7∼11학년 과정. 예를 들면 일반학교에서 물리 수학 등에 두각을 나타낸 학생은 7, 8학년 때 치열한 경쟁을 거쳐 과학특수학교에 진학해 11학년까지 마친 후 대학에 진학한다.
▼물리-수학 탄탄… IT성장 배경
과학영재는 대학교수가 지도▼
이들 특수학교는 모두 학비가 없으며 장학금까지 준다. 콜모고로프학교라고 불리는 모스크바 제18학교는 최고 명문대인 모스크바국립대(MGU) 부설학교로 기숙사까지 딸려 있다. 이 학교의 수업의 50%는 모스크바대 교수와 강사들이 직접 맡고 있다. 러시아의 MIT로 불리는 바우만공대와 러시아 전역의 천재들이 모여드는 모스크바물리공업대(MFTI) 등도 비슷한 부설학교를 가지고 있다.
과학고 졸업생들은 주요 명문 이공대에 무시험전형으로 진학한다. 러시아 이공대는 수학과 과학 경시대회 입상자들도 특별전형으로 뽑는다. 과학고는 발레 음악 등 예술학교와 상업학교 등 다른 특수학교에 비해 한때 인기가 떨어지기도 했으나 최근 경쟁률이 높아지는 등 다시 과거의 명성을 찾아가고 있다.
일반학교의 과학 기술 교육 수준도 특수학교 못지않다. 일반적으로 대학에서는 저학년 때 물리 수학 등 공통과목을 이수한 후 세부전공으로 넘어가게 돼 있어 서방의 대학에 비해 기초가 충실하고 범위가 넓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학과 연구소의 공동 연구도 활발해 모스크바대 물리학부의 경우 3학년만 되면 레베데프물리연구소 등에서 직접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프랑스
매년 7월 14일 프랑스혁명 기념일에는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서 개선문까지 군사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각 군 대표와 사관 생도들이 참가하는 이 퍼레이드의 선두는 언제나 ‘에콜 폴리테크닉(기술 대학)’ 학생들 차지다.
군인 사관학교도 아닌 이공계 학교일 뿐인 에콜 폴리테크닉 학생들이 선두에 서게 된 것은 나폴레옹 시대부터의 전통. 원래 기술계 장교를 배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에콜 폴리테크닉을 포병장교 출신인 나폴레옹 1세 황제가 중시하면서 이공계 우대의 전통이 자리잡았다.
지금도 에콜 폴리테크닉은 명예와 출세의 상징이다. 과학기술 전공이지만 과학자나 엔지니어로만 국한되지 않고 국가 고급 공무원이나 대기업 간부 자리가 보장된다. 비슷한 이공계 그랑제콜인 ‘에콜 드 민(광산학교)’이나 토목공과대학인 ‘퐁제쇼세’도 광산이나 토목현장보다는 정부의 에너지 건설 관련 부처의 고급 공무원으로 일하는 게 보통이다. 실제로 프랑스 과학·기술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고위 공직자는 거의 이공계 그랑제콜 출신이다.
▼이공계가 정부-기업 핵심인력
혁명기념퍼레이드선두‘예우’▼
명문 그랑제콜뿐만이 아니다. 일반 이공계 대학도 인문계 대학 출신보다 앞날이 탄탄하다. 취직이 100% 보장되는 것은 기본이고 인문계 출신과는 달리 기업체 간부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 인문계 출신들의 대졸 초임이 1500유로(약 170만원) 안팎인 반면 이공계는 2500유로(약 280만원) 정도.
여기에다 전국 각 지방과 기업체의 인력 수요를 각 대학과 연구소의 이공계 인력 공급과 실시간으로 연결하는 ‘기술 플랫폼’ 제도까지 도입되면서 이공계 인력 활용도는 더 높아지는 추세다.
재프랑스 한인 과학자협회장을 지낸 오영석(吳榮錫·54) 프랑스 국립응용과학원(INSA) 교수는 “5년제인 프랑스 이공계 대학교육은 3년제인 인문계와는 달리 엘리트 교육의 의미가 강하다”면서 “교육과정에 포함된 현장실습 등을 통해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간부나 관리자로서의 소양을 갖추게 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이공계 우대 전통이 오늘날 프랑스를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무기 수출국이자 첨단 전투기 라팔과 초음속 콩코드 여객기 및 상업용 위성 개발을 자랑하는 항공우주 기술국, 초고속 열차 테제베(TGV)를 수출하는 교통통신의 일류국가로 만들었다.
파리〓박제균 특파원 phark@donga.com
◇중국
중국은 이공계 출신들이 정계 최고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다.
중국 최고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는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7명만 보더라도 문과출신은 1명뿐.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과 리펑(李鵬)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상무위원장, 주룽지(朱鎔基) 총리를 비롯한 6명이 모두 엔지니어 출신이다.
장 주석이 상하이(上海)교통대에서 전기공학을, 리 상무위원장은 러시아 모스크바동력학원에서 수력발전을, 주 총리는 칭화(淸華)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는 등 중국을 이끄는 삼두마차가 모두 전기분야의 이공학도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차기 국가주석으로 예정돼 있는 후진타오(胡錦濤) 부주석은 칭화대에서 수리공학을, 차기 총리로 유력한 원자바오(溫家寶) 부총리는 베이징(北京)지질대학에서 지질구조학을 전공했다.
▼엔지니어 출신이 지도층 형성
기술개발-상품화 국가 주도▼
중국이 이처럼 ‘엔지니어 왕국’이 된 것은 과거 반식민지 역사에 대한 처절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19세기 과학기술혁명에서 유럽에 뒤떨어진 악몽 때문에 건국초기부터 대대적인 ‘과학흥국’ 운동을 시작했던 중국공산당은 80년대부터 본격 과학기술장려정책인‘863계획’을 수립, 시행에 들어갔다. 연구항목들을 정부가 지정해 중점 개발하며 개발된 기술들은 곧바로 전국 100여개소에 이르는 첨단기술개발구에서 제품 생산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중국이 최근 나노기술과 유전자공학 등 첨단과학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고 2005년 내에 유인우주선을 발사키로 하는 등 우주항공산업에서 큰 진전을 이룬 것은 모두 이 계획 덕분이다.
중국은 99년부터 매년 2명의 과학자를 ‘과학기술대상’에 선정, 500만위안(약 8억원)씩의 상금을 주고 있다. 국가에서 주는 상중 최고액으로, 장 주석의 후계자인 후진타오 부주석이 직접 시상식을 주관한다.
중국 지도부의 ‘과학기술 우선’ 사상은 장 주석이 지난해 12월 90세 생일을 맞은 노과학자 첸쉐썬(錢學森) 박사의 집을 찾은 데서도 잘 나타난다.
첸 박사는 미국 유학당시 미국 정부가 그의 재능을 아껴 귀국을 말렸으나 분연히 가난한 사회주의 조국으로 귀환했다. 그는 미사일을 개발하는 등 중국 항공과학 발전에 초석을 놓아 ‘양탄일성(兩彈一星·미사일 원자탄 인공위성)’ 개발의 1등공신이 됐다. 장 주석은 96년과 99년에도 첸 박사의 집을 방문, 노과학자에 대한 국가적 경의를 표하는 등 과학인력들의 예우에 애쓰고 있다.베이징〓이종환 특파원 ljhzip@donga.com
◇일본
한때 세계의 과학 기술을 이끌었던 일본은 요즘 정보기술(IT) 부문 등에서는 후진국이라는 위기감을 갖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 같은 위기를 정부의 ‘긴급 대책’으로 극복하겠다는 방침이다. ‘긴급 대책’의 골격은 총리 직속의 ‘종합과학기술회’를 만들어 범 정부 차원의 과학 기술 정책을 조율하고 첨단과학 분야와 이공계 교육 분야에 우선적으로 예산을 배정한다는 것 등이다.
지난해 1월에 발족한 종합과학기술회의 의장은 총리다. 과학기술담당상 문부과학상 경제산업상 재무상은 당연직 위원이고 노벨상 수상자 등 과학자 7명이 참여하고 있다. 다른 자문회의와는 달리 사무국에는 민간이나 대학에서 파견 나온 80여명의 우수 두뇌가 근무하고 있다. 각 성청의 이견을 조정하고 예산편성이나 중요 과학정책에 대해 제언하고 있다. 이들의 제언은 거의 그대로 정책에 반영된다.
이 회의의 성과는 2002년도 예산편성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일반 세출을 2.3%로 삭감하는 초긴축 예산을 짜면서도 과학기술진흥비는 1조1774억엔으로 지난해에 비해 5.8%나 늘렸다.
▼총리직속 科技정책회의 설치
이공계大 30곳 집중육성 추진▼
일본 정부는 과학기술 중에서도 IT, 나노 테크놀로지, 환경, 생명공학 등 4개 분야를 집중 지원 대상으로 결정했다. IT분야는 정부 산하에 별도로 IT전략본부를 두고 ‘e-Japan 2002 프로그램’을 추진중이다. 이 프로젝트는 2005년까지 4000만가구에 고속정보망을 깔고, 교육정보화와 인재육성, 콘텐츠 보강, 전자정부 실현, 지적재산권 보호 환경 정비 등을 통해 IT 선진국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것이다. 생명공학 부분에서는 인간 게놈 연구 결과를 이용한 신약 개발에, 나노 테크놀로지에서는 인재 육성, 연구시설 확충, 국제교류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그 핵심은 이공계 대학의 역량 강화다. 30개의 대학을 집중 육성하겠다는 ‘톱 30’ 프로젝트에 182억엔을 배정했다. 또 대학이 개발한 기술을 이용한 벤처기업 육성에 71억엔을 배정하는 등 산학협동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일본 정부는 국가가 추진하는 연구에는 대학 교수급의 ‘프로그램 디렉터’를 두고 이들이 테마 선정과 평가까지를 감독함으로써 예산 낭비와 비효율성을 막는 제도를 추진 중이다.
도쿄〓심규선 특파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