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P가 당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 입력 2002년 3월 12일 18시 39분



《삼성의료원 유전자클리닉은 최근 치매환자인 박 아무개(65)씨의 DNA를 분석했다. 분석 대상은 치매와 관련성이 깊은 19번 염색체의 APOE 유전자. 결과는 하루만에 나왔고, 예상대로 박씨의 유전자는 보통 사람과 염기 하나가 달랐다. 이 유전자의 484번째 염기가 보통 사람은 C이지만, 박씨는 T였다. 박씨처럼 APOE 유전자의 글자 하나가 T로 바뀐 사람은 한국인 가운데 9% 정도. 이 병원 김종원 박사(임상병리학)는 “박씨처럼 T로 바뀐 사람은 치매에 걸릴 확률이 정상인보다 5배 높고, 치매에 걸리지 않더라도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하지만 치매는 환경과 유전자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병하므로, 독서 등 두뇌활동을 많이 하면 T로 바뀐 사람도 치매를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미국 셀레라사의 과학자가 자동화된 기계로 DNA를 분석하고 있다.
박씨처럼 글자 한 두 개가 바뀌어 유전적 운명이 달라지는 것을 단일염기변이(SNP〓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s)라고 한다. 모든 사람은 DNA가 99.9% 같다. 30억 개의 염기 가운데 0.1% 즉 300만개의 염기가 사람마다 다르다. 바로 이것이 눈과 피부색, 인종, 생김새, 체질, 질병의 감수성 차이를 만들어낸다.

인간게놈지도의 완성 뒤, 이 0.1%의 염기 차이가 다양한 인종집단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밝혀내기 위한 ‘SNP 지도’ 제작이 미국립보건원을 중심으로 본격화되고 있다. 이미 중국와 일본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한국도 과학기술부가 참여를 검토 중이다.

지난달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도 “한국의 게놈연구는 동양인의 SNP 지도 제작에 집중하는 차별화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정부에 촉구했다. 게놈연구 프론티어사업 책임자인 생명공학연구원 유향숙 단장은 다음 달 중국에서 열리는 국제인간게놈회의에 참가해 아시아 각국과 발굴한 SNP 정보를 공유하는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유향숙 박사는 “한국인의 단일염기변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할 경우 질병 감수성의 개인 차이를 밝혀 개인별 ‘맞춤약’을 개발하고, 한민족의 체질과 민족이동경로 등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삼성의료원 김종원 박사는 “한국인의 단일염기변이를 DB로 구축하면 국내에서도 연간 수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약물 부작용 사망자를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의약품 부작용으로 매년 최소한 10만 명이 죽고, 200만 명이 입원한다는 보고가 나와 있다.

한국얀센이 2년 전부터 판매한 라베프라졸은 맞춤약의 초보적 성공 사례이다. 간의 약물대사와 관련이 있는 10번 염색체의 CYP2C19 유전자에서 두 개의 염기가 바뀐 사람은 위궤양 치료제를 금세 간에서 분해해 버리기 때문에 약효가 유지되기 어렵다. 이런 사람은 동양인 가운데 특히 많아 한국인은 60%나 된다. 라베프라졸은 이런 환자에게도 효과를 나타낸다.

이미 국내외에서 여러 기업이 신약 개발과 특허 선점을 노리고 정부보다 앞서 SNP 연구에 뛰어들었다. 벤처기업 마크로젠은 민간차원에서 한국인, 몽골인의 SNP 지도 제작키로 하고, 몽골인 분자생물학자 2명을 한국에 초청해 교육 중이다.

벤처기업인 에스엔피제네틱스도 한국인 6000여명을 대상으로 천식, 간암 등 질병과 관련이 있는 단일염기변이를 분석 중이다. 이 회사 신형두 사장은 “앞으로 10년 뒤에는 단숨에 수만개의 변이를 분석할수 있는 SNP칩이 나와 체질에 따라 약을 고르고 질병 발생 가능성을 추정해 예방법을 의사와 상담하는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체질에 따른 처방을 했지만, 앞으로는 사람을 수천 수만 가지 체질로 나누어 처방을 달리하는 시대가 올 전망이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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