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수요일 서울대병원 본관 10층 이비인후과 병동. 희끗희끗한 머릿결에 수척한 표정의 노신사 10여명이 모인 가운데 박승씨(66)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듯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발음하는 것이 무척 힘겨워 보였다.
이들은 서울대병원 이비인후과에서 후두암 판정을 받아 성대를 절제하는 수술로 ‘말을 잃은 사람들’. 매주 두 차례씩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음성재활 훈련을 받고 친목을 도모하는 환우회 모임이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환우회 모임이 점차 활성화되고 있다. 희귀 질병이나 난치성 질환을 가진 사람과 가족이 모여 일종의 네트워크를 형성한 것. 이들은 온라인, 오프라인을 넘나들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최신 치료 정보에 대해 공유하며 전문의를 초청해 강의를 듣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일부 환우회 모임은 선진국처럼 재단(foundation) 형태로 발전해 기금을 모아 불우한 환자에게 치료비를 대주고 관련 질환의 정복을 위해 전문가에게 연구비를 지원하기도 한다.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사람은 희귀 난치성 질환을 가진 환자나 가족들이다. 환자 수는 적지만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기 어려워 관련 질환 전문가와 함께 모임을 꾸린 것.
최경석씨는 쇼그렌 증후군에 걸린 아내를 위해 홈페이지 ‘병준이네 이야기’(my.dreamwiz.com/sjogren)를 운영하고 있다. 아내가 투병 생활 중 얻은 아들의 이름을 딴 이 사이트는 눈물과 침의 분비량이 줄어 눈과 입이 건조해지는 쇼그렌 증후군 환자의 정보 교환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레트 증후군을 앓는 딸을 가진 박현자씨(40·여)는 2년 전 레트 증후군 모임(www.rett.pe.kr)을 만들었다. 레트 증후군은 정상적인 발육을 보이던 여자 아이가 1∼4세 정도에 자신이 배웠던 언어 손동작 등을 잊어버리는 희귀 질환으로 국내에는 70여명 정도의 환자가 있다. 15가구 정도가 정기적으로 모임에 참가하고 있으며 최근 외국의 전문 서적을 공동 번역한 책 ‘렛 증후군 핸드북’을 출간했다.
백혈병 환자의 소모임이 발전한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은 환자와 가족뿐만 아니라 의사 약사 간호사 영양사 사회복지사까지 참여하는 거대 환우회. 지난해에는 백혈병에 걸린 어린이 250여명에게 8억원을 치료비로 지원하기도 했다.
같은 목적을 가졌더라도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이기 때문에 종종 불협화음도 생긴다. 사람마다 질환의 정도가 다르고 환우회에 기대하는 수준도 천차만별이기 때문. 후원금 등을 누구에게 먼저 지원해야 하는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도 불협화음의 대상이다. 또 일부는 환우회를 앞세워 사욕(私慾)을 채우려다가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경기 수원 아주대병원 유전학클리닉 김현주 교수(한국희귀질환연맹 대표)는 “회원으로 참여하려면 자신이 모임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먼저 생각해야 환우회를 성공적으로 운영해 갈 수 있다”고 충고한다.
김 교수는 환우회의 성공조건으로 △회원끼리 속설에 따른 판단으로 검증이 안된 약을 돌려쓰지 말고 △반드시 전문의의 도움을 받아 질환에 대해 공부하며 △자신의 주장만 펴지 말고 남의 이야기를 먼저 듣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차지완기자 marudu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