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는 사무실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컴퓨터와 모니터, 프린터, 모뎀을 늘 켜놓는다. 매일 컴퓨터를 부팅하기가 귀찮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시청하지 않을 때도 VCR, 셋톱박스는 작동하고 있고, 휴대폰 충전기에는 언제나 불이 들어와 있다.
도난방지시스템은 항상 ‘ON’ 상태이고, DVD플레이어, 자동응답전화기, 전자레인지, 심지어는 아이들의 비디오게임기도 켜져 있다.
이처럼 사용하지도 않는 전자제품이 각 가정과 사무실에서 ‘전기 흡혈귀’처럼 전기를 빨아먹고 있다. 리모콘형 전자제품이 늘고, 전자제품이 네트웍으로 연결되고, 작동상태를 알려주는 디스플레이가 전자제품마다 들어가면서 ‘대기 전력’ (standby power) 소비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복사기나 비디오는 전체사용전력의 80%가 대기전력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일본은 가정 전력소비의 12%, 독일은 10%, 프랑스는 7%, 미국은 5%가 대기전력이다. 지난해 여름 전력난이 심각해지자 부시 대통령은 “대기 전력 1W 이하의 전자제품만 정부기관이 구매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에서는 매년 13억 달러 어치의 전기가 대기전력으로 날아간다.
국제에너지기구는 OECD 국가의 경우 한 가구 당 전력소비량의 10%인 평균 60W를 대기전력으로 쓰지만, 적절한 절전 기술을 도입하면 75%를 절감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국내 대기전력 실태는 정확히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에너지관리공단과 전기연구원은 우리나라도 가정 전기소비량의 10% 정도가 대기 전력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난해 한 가구당 월평균 전기요금은 2만4370원이다. 따라서 가구당 매달 2400원, 전체 가구로 볼 때는 매년 4500억원이 대기전력으로 날아가는 셈이다. 여기에 팩스, 복사기 등 각종 사무기기가 항상 켜져 있는 사무실의 대기 전력까지 합치면 ‘새는 전기’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관리공단은 갈수록 전력 낭비의 주범이 돼가고 있는 대기전력을 줄이기 위해 1999년 에너지절약마크제도를 도입해 컴퓨터 프린터 TV 등 14개 품목의 절전형 전자제품에 e마크를 붙여주고 있다. 에너지관리공단 정호상 효율관리팀장은 “e마크 제도 도입 이후 국내 가전3사가 절전형 신제품을 선보여 비디오의 경우 3년 전 제품은 대기전력이 7W였으나 최근에는 0.2W까지 떨어진 제품이 나왔다”고 말했다.
전기연구원의 절전 전문가인 김은동 박사는 “슬립 모드로 자동 전환돼 대기전력을 획기적으로 줄인 지능적 전자제품이 e마크 도입 이후 많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가정에는 구형 전자제품이 많아 전체의 10∼20% 만이 절전형”이라고 말했다. 김 박사는 “특히 우리는 절전 기술을 선진국 기술 도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기술 개발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국제에너지기구는 품목별로 대기전력이 가장 적은 전자제품 38개를 발표했는데 이중 한국산은 LG의 휴대폰 하나 뿐이었다.
대기전력을 줄이려면 △e마크가 붙은 절전형 제품을 구입하고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전원 플러그를 뽑아 놓고 △여러 전자제품의 전원을 한꺼번에 끌 수 있는 탭스위치를 쓰고 △컴퓨터는 모니터 절전기능 등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윈도 제어판의 ‘전원관리’ 기능을 설정하는 것이 좋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 기자 dong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