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강국'의 그늘

  • 입력 2003년 3월 19일 19시 36분


최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세계적인 게임개발업체 EA(Electronic Arts)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세계 최대의 게임 업체로서의 비전과 경영 노하우 등을 묻는 자리에서 최고경영자(CEO) 래리 프롭스트는 어느 순간 기자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미국에서처럼 한국에서도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와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2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느냐” 물었다.

“그렇지 못하다”는 대답과 함께 이들 업체가 한국에 진출한 뒤의 경과에 대해 대략 설명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주제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온라인 게임’으로 옮아갔다.

프롭스트 사장은 “한국은 이제 과거의 한국이 아니다”라고 얘기하면서 “엔씨소프트는 정말 대단한 회사”라고 칭찬했다.

이어 기자가 “엔씨소프트 외에도 웹젠 CCR JC 등 온라인 게임으로 큰 수익을 올리는 업체가 많다”고 얘기하자 프롭스트 사장과 배석했던 제프리 브라운 홍보이사는 즉석에서 업체 이름과 게임명, 기자가 얘기한 이들 업체의 매출과 수익 등을 꼼꼼히 받아 적기 시작했다.

EA를 비롯한 세계 굴지의 게임 업체들은 게임의 진화된 형태를 ‘온라인 게임’으로 보고 이 부분에 대한 투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게임 업계의 미래를 보려면 한국을 보면 된다”는 얘기는 이미 세계 게임 업계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터뷰를 하는 게 아니라 인터뷰를 당하는 심정은 그러나 한편 씁쓸했다. 한국의 온라인게임 사업에 대한 예찬을 들으면서 머릿속 한편에는 딱히 갈 곳, 놀거리가 없는 한국의 청소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국의 게이머들은 나름대로 가상 세계에서 질서정연한 커뮤니티를 만들고 있다”는 엔씨소프트 김택진 사장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를 하지만, 온라인 상의 거대한 커뮤니티는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아닐까?

정권이, 장관이 바뀔 때마다 들썩이는 입시제도 때문에 초조해 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는 학부모들. 공부를 하든 안 하든 되도록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부모에게 보여줘야 하는 자녀들.

‘아이들이 온라인 게임에 중독됐다’고만 표현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 어찌 보면 청소년들은 ‘투자한 시간만큼 정확한 보상이 따라오는 세상’을 찾아갔다고 볼 수도 있다.

‘골방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온라인보다 열린 마당에서 벌어지는 현실 체험이 더 행복한 청소년들을 보고 싶다. 게임을 해도 중고교생 자녀와 머리 희끗희끗한 아버지가 거실에 함께 앉아 한 판 승부를 벌이는 세상을 꿈꿔본다.

나성엽 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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