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만 해도 도쿄 오타(大田) 지역과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모노즈쿠리마치(モノづくり街·제조의 거리)’였던 이곳. 10년 불황 끝에 2000여 중소업체들이 도산하거나 중국으로 이전했고 일자리를 찾아 젊은이와 엔지니어들이 떠나면서 도시가 활력을 잃었다.
재작년 이곳의 중소기업인들은 힘을 합쳐 우주에 쏘아 올릴 인공위성을 2005년까지 만들겠다고 나섰다. 소규모 인공위성을 띄우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관련 업체들을 이곳으로 끌어 모으고 기술축적을 통해 히가시오사카를 우주산업의 메카로 재생시키겠다는 것이 중소기업인들의 생각.
처음에는 ‘황당한 발상’이라며 냉소적이었던 사람들도 이들의 도전정신에 감동해 도쿄대와 오사카대 교수들이 기술 지원을 자청하고 나섰고 일본 정부도 자금지원을 시작했다. 일본우주개발사업단(NASDA)도 이들에게 도움을 주려 나섰고 도쿄로 떠났던 젊은이들도 속속 돌아오고 있다. 이제 이 소도시는 요즘 부활하는 일본 도전정신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일본에는 히가시오사카 같은 ‘클러스터’가 19개나 생겼다. 일본인들은 3800여 기업과 200여 대학이 참가한 이 19개 클러스터가 침체한 지역 경제를 되살려줄 성장엔진이 될 것으로 믿고 있다.
‘송이’ ‘덩어리’란 뜻의 클러스터는 기업, 연구기관, 대학, 자치단체가 힘을 모으는 산업조직 덩어리. 영화의 할리우드, 정보기술(IT)의 실리콘밸리, 벤처의 대덕단지 등이 그 사례다.
▽무너진 지역경제=오사카 시내 한 가운데를 흐르는 인공강 ‘도톤보리’. 올해 이 지역 프로야구팀 한신 타이거스가 센트럴리그 우승을 거머쥐자 극성팬 5300명이 도톤보리로 뛰어들었다. 이 장면이 TV를 통해 전 세계로 전해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하지만 도심에서 10분만 걸어 나가면 분위기는 영 딴판이다. 오후 3시에도 상점은 서너 곳 걸러 한 곳씩 셔터를 내렸고 길거리엔 노숙자가 가득하다. 늘어선 택시는 수십m씩 꼬리를 이었다. 수백년을 이어온 ‘시니세’(전통 상점)도 힘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지방으로 갈수록 상황은 더 참담하다. 아오모리 돗토리 도야마 등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일수록 시내 중심부는 ‘유령 도시’를 연상케 할 정도. 유일하게 북적대는 곳은 역 앞의 ‘100엔 숍’ 뿐이다.
후쿠오카현 아소 와타루(阿蘇渡) 지사는 “10년 불황으로 도산하는 업체가 늘고 협력업체들이 대기업을 따라 생산시설을 중국으로 이전하면서 공단이 황폐화됐고 젊은 인력들도 고향을 등지고 떠나갔다”고 한숨지었다.
▽‘how’가 아니라 ‘what’이다=일본의 클러스터는 요즘 신기술이나 신상품을 개발하느라 여념이 없다. 대기업들이 경영혁신 과정에서 과거의 협력관계를 끊거나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이전하면서 대기업만 쳐다볼 수 없게 된 것.
이소무라 다카후미(磯村隆文) 오사카 시장은 “대기업이 요청한 상품을 어떻게 하면 싸고 좋게 만들까를 고민하던 시대는 끝났다”며 “대학 기업 지자체가 힘을 합쳐 혁신적인 기술, 상품, 서비스를 만들어내야만 지역 경제가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생산성이 아니라 창의력이, ‘5%의 개선’이 아니라 ‘50%의 혁신’이 해법이 되는 것이다.
유전자 치료약을 개발하는 안제스MG는 오사카 지역 클러스터의 첫 성공작. 오사카대의 연구력과 다이이치제약 등 기업의 판매망, 시당국의 재정 지원이 결합돼 만들어진 바이오 벤처기업인 이 회사는 설립 1년 만인 2000년 도쿄증시에 상장됐다. 대학 벤처의 도쿄증시 상장은 처음. 시초가는 400만원.
현재 가장 성공한 클러스터로 평가받는 곳은 후쿠오카 반도체 클러스터. 후쿠오카공항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고층 빌딩엔 소니, NEC, 후지쓰, 마쓰시타 등 일본 유수의 반도체 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호야, 세이코엡슨, 제이엠넷 등 시스템LSI를 설계하고 개발하는 중견 벤처기업 500개사 정도가 이곳에 몰려있기 때문. 일본 반도체 생산의 30%, 세계의 10%를 이 지역이 담당하고 있다.
대학들도 지역 경제에 도움을 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지역 경제가 무너지면 지역대학도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체험했기 때문.
긴키(近畿)대는 내년 봄 히가시오사카에 ‘모노즈쿠리 대학원’을 설립한다. 원생은 2년간 지역 기업에서 연구개발을 함께 한다. 대학측은 논문으로 학위를 심사하지 않는다. 시장에 내놓을 신상품을 개발하거나 벤처기업을 창업해야 비로소 공학석사 학위를 준다.
▽도시의 재창조=고베(神戶)시가 있는 효고(兵庫)현은 1996년 대지진의 참화 이후 늙은 도시로 전락했다. 도시 외모는 그런대로 회복됐지만 고향을 떠난 젊은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민하던 효고현은 철강산업과 물류기지라는 과거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아예 바이오와 의료산업을 집중 육성하기로 했다. 도시를 재창조하기로 선언한 것.
고베시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조성되고 있는 ‘하리마 과학도시’는 이런 미래 전략의 결정체. 효고현은 이 도시 중심에 1994년 일반 X선보다 1억배나 밝은 방사광을 만들어내는 광학연구센터 ‘스프링(SPring)-8’을 유치했다.
‘스프링-8’이 들어서자 다이니혼제약 등 일본 굴지의 제약회사 연구시설이 대거 몰려들었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방사광으로 질병의 원인이 되는 단백질 구조를 원자(原子) 수준에서 분석할 수 있기 때문.
고베시는 요즘 시청 앞쪽의 바다에 인공섬 ‘포트 아일랜드’를 만들고 있다. 이곳에는 최첨단 의학 연구개발 클러스터가 들어설 예정. 교토 오사카 등 간사이지역의 대학, 바이오벤처도 함께 참가하고 있이다.
야다 다쓰오(矢田立郞) 고베 시장은 들뜬 목소리로 “포트 아일랜드가 완성되면 고베시에는 1만8000여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3300억엔의 경제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산업연구원(KIET) 허문구(許文九) 박사는 “한국의 클러스터는 관(官)이 주도하면서 실질적으로 이룩한 성과는 별로 없지만 일본은 기업이 클러스터를 주도하면서 지자체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기업을 돕고 있다”며 “한국 정부와 지자체가 일본의 클러스터 전략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
이병기 배극인 홍석민 박형준기자 (이상 경제부)
▼'클러스터'란 ▼
기업 연구기관 대학 지방자치단체 등이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만든 네트워크를 뜻한다. 공동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부품조달 인력 및 정보교류를 하기 때문에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게 장점. 미국의 ‘실리콘밸리’가 좋은 예다.
▼"韓-中과 연계 경제회생"…'우라니혼 지역' 변신중 ▼
나카오키 유타카(中沖豊) 도야마현 지사는 취재진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아시아 지도부터 펼쳐 보였다. 현청에서 직접 제작한 것. 일반적인 지도와 달리 일본이 꼭대기에서 한국과 중국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일본이 아시아와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있죠. 일본해(동해를 지칭)와 황해는 아시아의 지중해입니다. 오히려 도쿄를 중심으로 한 동부 지역은 아시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도야마현이 한국과 중국에 가깝습니다.”
도야마현이 경비를 들여 이런 지도를 만든 데는 사연이 있다. 부산 바로 아래쪽의 후쿠오카를 비롯해 시마네 돗토리 도야마 니가타 등 동해에 접한 지역은 지금까지도 ‘우라니혼(裏日本·뒷 일본)’으로 불리고 있다. 일본의 경제성장이 오사카-도쿄 벨트를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이 지역은 줄곧 소외돼 왔기 때문.
변변한 국제공항도 없었고 고속도로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다. 젊은 층은 근대화와 더불어 산업시설이 밀집돼 있는 동쪽으로 떠났다.
하지만 이들 ‘우라니혼 지역’이 변신을 꿈꾸고 있다.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 다른 아시아 국가와 연대를 통해 지역경제를 재생시키겠다는 것.
도야마현은 과거 중국과 한국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던 만큼 한방(漢方) 분야에서만큼은 일본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변변한 산업시설이 없는 도야마현은 이 부분에 주목했다.
도야마의과약과대학 부설 ‘한약 및 일본식 한약 연구소’를 주축으로 2001년부터 세계 전통의약학 연구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한 발 더 나아가 ‘한방의 세계 표준 구축’에 나섰다.
한방은 의사와 환자에 따라 처방이 달라 대중화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착안해 수십만 가지의 체질과 처방을 컴퓨터에 입력, 양의(洋醫)라도 쉽게 처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게 목표.
전 세계 전통의약학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해마다 수십 건의 심포지엄을 개최, 아시아 지역 연구원을 차례로 초청해 공동연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돗토리현은 아시아를 향한 일본의 물류 거점을 목표로 가타야마 요시히로(片山善博) 지사가 한국 몽골 중국 북한을 발로 뛰어다니고 있다.
가타야마 지사는 “1996년 한국으로 건너가 읍소하다시피 해 개설한 부산과 돗토리 간 직항로가 이제 주 3회로 늘어났는데도 부족할 지경”이라며 활짝 웃었다. 8년 전만 해도 주 1회를 다니던 배가 짐이 없어 빈 배로 다니기 일쑤였다.
돗토리는 물류를 통한 아시아 허브까지 내다보고 있다. 현이 나서서 아시아 각국과 협의체를 만드는 한편 일본 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재일교포를 정식 공무원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돗토리현 공무원들이 한글이나 중국어 명함을 건네는 것은 낯선 광경이 아니다.
부산과의 교류가 많은 후쿠오카도 예외는 아니다. 후쿠오카는 ‘반도체 클러스터’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올 3월 정보기술(IT) 인재 양성소를 만들었다. 한국, 인도, 중국의 IT 전문 인력을 대거 유치해 아시아 최대의 IT 거점 도시를 만든다는 목표를 세우고 뛰고있다.
주요 우라니혼지역의 변신 | |
도야마현 | -한방(漢方)의 세계 표준화를 만든다는 목표 -한방 처방전을 규범화 하는 작업에 나섬 |
돗토리현 | -아시아 각국과 물류 관련 협의체를 구성함 -아시아 최대의 IT 거점 도시로 만든다는 목표 |
후쿠오카 | -아시아를 겨냥한 일본의 물류 거점 도시가 목표 -한국, 인도, 중국의 정보 기술 인력을 대거 유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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