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김상훈기자 corekim@donga.com 》
“철커덩.”
육중한 철문이 닫혔다. 시린 느낌의 파란 죄수복. 어렴풋이 기억나는 거라고는 술을 무척 많이 마셨고 어떤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리다가 주먹질을 했고 순찰차가 도착했고…. 그 후로는 블랙아웃(Black Out).
4월 중순의 한 오후. 바깥세상은 봄볕으로 무르익었는데 시멘트 담과 철창으로 둘러쳐진 나의 안쪽 세상은 시린 늦겨울이다. 냉기로 무릎 관절이 시려온다. 춥고 숨 막히는 냉골 ‘빵깐’에서 여섯 달을 지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걱정과 절망감보다 술 귀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으로 오히려 희열마저 느꼈다.
술 때문에 이미 나는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선친과 아이들 엄마는 나의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끝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고통 속에 살다가 62세, 31세의 아깝기 그지없는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평생 씻지 못할 대죄가 아닌가.
대학에 입학한 뒤 선배들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들었던 게 술과 맺은 악연의 시작이었다. 쓸개즙까지 토해내는 고통으로 눈물까지 글썽였지만 짜릿한 해방감과 자유를 느꼈다. 그 후 직장에 들어가서도 나는 술을 버리지 못했다. 술 때문에 직장생활에도 위기가 생겼다. 회사와 술집을 오가는 게 어느 덧 일상이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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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사려 깊은 아내의 내조 덕분에 그럭저럭 건강을 유지했다. 휴일이면 가족동반 여행을 하며 단란하고 평범한 가정생활의 행복도 느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술은 버리지 못했다. 여행에서 돌아올 무렵이면 가족들은 내 음주운전 때문에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가을. 2세, 6세 된 딸들을 남겨두고 아내가 생을 마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무력감에 간절하게 신을 찾았지만 신은 내 기도를 받아주지 않았다. 영혼과 육신은 모두 극도로 피폐해졌다. 상실감을 떨치기 위해 죽어라 술을 마셨다. 두 번의 자살기도. 나는 어느 새 알코올중독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아내는 의료사고로 사망했다. 3년간 계속된 소송은 이겼지만 불행은 그치지 않았다. 출판사를 운영하던 친척의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대출금을 끌어주고 보증도 섰다. 사업은 부도가 나고 퇴직금도 압류됐다. 명예퇴직한 뒤 상실감은 더욱 심해졌다. 아내의 환영(幻影)이 자주 보였다. 술을 마신 뒤 정신을 잃거나 탈진하기도 했다. 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 다녀야 했다.
술을 끊기 위해 알코올 병동치료와 재활교육을 받았다. 술의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 체력의 한계를 넘어설 때까지 마라톤에 전념해 달리고 또 달렸다. 증오했던 신과의 화해도 모색하면서 영적인 안정도 추구했다.
8개월간의 금주(禁酒). 그러나 퇴원 후에는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세상은 나로부터 등을 돌렸고 나는 너무 초췌해져 있었다. 나 자신에 대한 연민과 신에 대한 원망으로 울분과 서러움이 치솟아 올랐다. 귀향열차에서 소주를 병째 들이부었다.
나는 이 무렵 술잔을 기울이며 죽음의 그림자를 따라 나서려고 했다. 우연히 큰 딸 아이의 해묵은 일기장을 발견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아빠는 우리를 버려 둔 채 술에 빠져 사신다. 나는 너무 어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꾸 눈물만 나온다. 죽고 싶다.’
내가 맨 처음 병원으로 끌려갔을 당시 큰 딸의 일기였다. 그 때 큰 딸은 열 살. 여섯 살 된 동생을 돌보며 얼마나 힘들었으면 죽음을 생각했을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이미 사랑하는 두 사람을 죽인 죄인이 아닌가. 딸들까지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다.
그 날 새벽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며 짐을 꾸렸다. 이번에는 자발적으로 병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새 사람이 될 것을 각오했다. 10년 넘게 엄마를 잃은 상실감에 아빠의 방황을 묵묵히 지켜보던 딸아이들. 그들이 바로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 위대한 힘인 것이다.
▼심사평▼
본선을 거쳐 수기 부문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은 총 4편이었다. 심사 과정에서 알코올 중독이 가정 문제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구조 또는 병리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 해 내내 마음이 무겁고 우울했다.
그러나 작품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빛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은근히 감동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오랜 고심 끝에 대상작으로 김향신씨의 ‘위대한 힘-내 딸’을 결정했다.
이 작품은 생생한 알코올 중독 체험과 그로 인한 가정 파탄, 절망을 딛고 일어서려는 고군분투가 리얼하면서도 문학적으로 표현돼 읽는 맛을 느끼게 해 줬다. 특히 아버지의 음주와 중독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감으로써 아버지의 절망을 극복하는 데 큰 힘으로 작용한 딸의 편지는 공감대를 확대하는 결정적 모멘트가 됐다.
장황하고 지루하지 않은 언어와 문장 구사력, 적절한 분량도 대상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계기가 됐다.
포스터 부문 우수작 ‘빼앗긴 아빠’는 초등학생의 작품으로 술에 끌려간 아버지의 모습과 자신, 어머니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잘 그렸다. 표어 부문에서는 1600편 가운데 3편을 선정하는 게 매우 어려웠지만 알코올 또는 음주와 관련해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수상자에게는 축하를, 낙선자에게는 다음 기회를 권유하면서 응모한 모든 분들의 건강과 정진을 기원한다.
알콜 수기 및 공모전 수상작 | |||||||||
김재홍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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